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위원회(오충일 위원장)는 "1975년 4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의 사형집행이 형 확정 18시간 만에 이뤄진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7일 밝혔다. 그러나 이를 증명하는 문서나 진술 등은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상 1974년)은 "박 전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짜맞추기식으로 수사가 진행됐고, 고문 등으로 사실상 조작됐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차 인혁당 사건(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1964년 8월 14일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지하조직 '인혁당'을 적발,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은 수배 중"이라고 발표했다.
①인혁당은 실재했나=중앙정보부는 인혁당이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고 국가변란을 기도하기 위한 '지하정당'으로 규정했다. 진실위는 인혁당은 당 수준에 이르지 못한 서클 형태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고, 인혁당이라는 명칭도 여러 명칭 중 하나로 언급됐을 뿐이라고 밝혔다. 강령과 규약도 일부 논의된 바는 있지만 정식 채택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이 아닌 혁신계 통합을 위한 서클 모임이었다는 것이다.
②간첩 조종받았나=중정은 월북 남파간첩 김영춘이 창당을 주도했고, 김배영은 창당에 참여한 뒤 월북했다가 다시 남파됐다고 발표했다. 진실위는 김영춘은 특수공작임무를 받고 북파된 것이며, 김배영은 인혁당 사건 발생 3개월 뒤에 월북했지만, 중정은 발표 당시 그의 행적을 모르면서 인혁당 사건에 개입된 것처럼 발표했다고 했다.
③고문 없었나=진실위는 당시 각종 기록들과 관련자 진술로 미뤄 중정이 물, 전기, 구타 등 각종 고문을 자행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검찰이 고문의혹을 밝히겠다고 재수사에 착수했음에도, 당시에 수사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데다 수사기록 역시 사라졌다고 했다.
◆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년)
유신반대 시위가 격화되던 1974년 4월 25일 당시 신직수 중정 부장은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재건위)의 조종을 받아 국가변란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이해찬 국무총리, 유인태 의원 등 민청학련 연루자 253명이 구속됐고, 재건위 관련자 23명 중 8명은 사형을 당했다.
①실재했나=중정은 민청학련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가 결성돼 서울지도부, 경북지도부를 두었다고 발표했다. 진실위는 사건 관련자들이 서울, 대구 등지에서 몇 차례 만났을 뿐이라고 했다. 재판과정에서 단일조직 결성사실이 입증되지 못하자 대법원이 '인혁당재건단체'라는 이름으로 성격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민청학련도 유인물 제작 과정에서 임시방편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실재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②민청학련 조종했나=중정 등 수사기관은 민청학련이 이른바 인혁당재건위의 배후조종을 받아 그 배후에 공산세력이 있다고 발표했다.
진실위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인 여정남이 민청학련 주도학생들과 몇 차례 교류는 했지만 그 이외의 사실은 없다고 발표했다.
③유언 조작했나=사형을 당한 도예종씨의 "적화통일 되기를 바란다"는 유언에 대해서도 과거사위는 "조작됐다"고 했다. 그런 유언을 들은 입회인이 없고, 사형집행명령부를 작성한 이모씨는 "공산주의자가 통일이라고 해 적화통일이라고 생각하고 적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