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위원회(오충일 위원장)는 "1975년 4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의 사형집행이 형 확정 18시간 만에 이뤄진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7일 밝혔다. 그러나 이를 증명하는 문서나 진술 등은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상 1974년)은 "박 전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짜맞추기식으로 수사가 진행됐고, 고문 등으로 사실상 조작됐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975년 인혁당 판결. 75년 4월8일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에 대한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이 있자 가족들이 법정에서 재판부에 항의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1차 인혁당 사건(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1964년 8월 14일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지하조직 '인혁당'을 적발,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은 수배 중"이라고 발표했다.

2005년 과거사委 발표.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이 6일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 조사 결과 발표회에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명원기자 mwlee@chosun.com

①인혁당은 실재했나=중앙정보부는 인혁당이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고 국가변란을 기도하기 위한 '지하정당'으로 규정했다. 진실위는 인혁당은 당 수준에 이르지 못한 서클 형태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고, 인혁당이라는 명칭도 여러 명칭 중 하나로 언급됐을 뿐이라고 밝혔다. 강령과 규약도 일부 논의된 바는 있지만 정식 채택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이 아닌 혁신계 통합을 위한 서클 모임이었다는 것이다.

②간첩 조종받았나=중정은 월북 남파간첩 김영춘이 창당을 주도했고, 김배영은 창당에 참여한 뒤 월북했다가 다시 남파됐다고 발표했다. 진실위는 김영춘은 특수공작임무를 받고 북파된 것이며, 김배영은 인혁당 사건 발생 3개월 뒤에 월북했지만, 중정은 발표 당시 그의 행적을 모르면서 인혁당 사건에 개입된 것처럼 발표했다고 했다.

③고문 없었나=진실위는 당시 각종 기록들과 관련자 진술로 미뤄 중정이 물, 전기, 구타 등 각종 고문을 자행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검찰이 고문의혹을 밝히겠다고 재수사에 착수했음에도, 당시에 수사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데다 수사기록 역시 사라졌다고 했다.

◆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년)

유신반대 시위가 격화되던 1974년 4월 25일 당시 신직수 중정 부장은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재건위)의 조종을 받아 국가변란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이해찬 국무총리, 유인태 의원 등 민청학련 연루자 253명이 구속됐고, 재건위 관련자 23명 중 8명은 사형을 당했다.

①실재했나=중정은 민청학련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가 결성돼 서울지도부, 경북지도부를 두었다고 발표했다. 진실위는 사건 관련자들이 서울, 대구 등지에서 몇 차례 만났을 뿐이라고 했다. 재판과정에서 단일조직 결성사실이 입증되지 못하자 대법원이 '인혁당재건단체'라는 이름으로 성격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민청학련도 유인물 제작 과정에서 임시방편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실재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②민청학련 조종했나=중정 등 수사기관은 민청학련이 이른바 인혁당재건위의 배후조종을 받아 그 배후에 공산세력이 있다고 발표했다.

진실위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인 여정남이 민청학련 주도학생들과 몇 차례 교류는 했지만 그 이외의 사실은 없다고 발표했다.

③유언 조작했나=사형을 당한 도예종씨의 "적화통일 되기를 바란다"는 유언에 대해서도 과거사위는 "조작됐다"고 했다. 그런 유언을 들은 입회인이 없고, 사형집행명령부를 작성한 이모씨는 "공산주의자가 통일이라고 해 적화통일이라고 생각하고 적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