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는 저무는가. 미국 시사 계간지 '아메리칸 인터레스트'가 최신 겨울호에서 이 문제를 조명했다. 저명한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코랄 벨(Bell·사진) 호주 국립대 객원교수는 '단극세계(Unipolar World)의 황혼'이란 기고문에서 "탈냉전기 초강대국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단극체제는 이미 황혼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며 "미국은 다극화하는 세계에서 안정 확보를 위해 인도·중국 등 신흥대국을 포함한 강대국들과 협조체제(Concert of Powers)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非)서구의 부상과 구(舊)서구의 균열=비서구권의 인구 성장은 폭발적이다. 연령도 비서구권은 10~30대 청년층이 주류인 데 반해 서구에서는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다. 신흥 대국의 젊은이들은 국제질서의 현상 타파를 추구할 것이다. 또 세계의 부(富)가 중국 등 아시아로 이동하면서 미국의 경제 우위와 그것에서 비롯하는 정치적 특권도 잠식당할 것이다.
탈냉전 이후 유럽은 더 이상 미국의 외교정책을 추종할 이유가 없어졌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 침공에 앞서 유엔 승인을 얻으려 할 때 다른 나라들이 보여준 태도는 단극체제의 변화를 알리는 이정표였다. 유럽연합(EU)은 범위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러시아와 접근할 것이다. 유럽은 러시아의 자원이, 러시아는 유럽의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프트파워' 잠식=과거 많은 나라들은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체로 편승했다. 전후 질서를 주도했고 정책 노선도 대체로 신중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2년 이후 부시 미 행정부는 신중함이 없었다. 2001년 9·11 직후 미국은 많은 나라들의 동정과 지지를 누렸지만 지금은 우방들에서조차 반미 감정이 팽배해 있다. 전 세계에 팽배한 반미주의의 원인 중 하나는 미국이 단극체제의 정점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과거 강대국들에 대한 반감은 여러 갈래로 분산됐지만 지금은 자신을 '세계 관리자'로 자처하는 미국 한 곳에 집중돼 있다.
◆힘의 균형보다 협조체제를=단극체제의 황혼기는 20년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이 과도기 동안 미국은 장차 다른 강대국들과 '힘의 균형'을 추구할 것인가, '협조체제'를 구축할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후자가 상호 대결보다는 결집을 도모할 수 있고 위기 관리에도 효과적이다. 힘의 균형은 반미 동맹을 자초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19세기 강대국들의 협조체제는 헤게모니 쟁탈전을 막는 데 성공적이었던 반면, 이후 국제연맹이 구축돼 있던 기간에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협조체제 구축을 위한 외교 자산으로는 유엔 안보리보다 G-8(서방 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인도·중국 등 신흥 강대국을 포함시켜 G-12로 확대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