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의 고급 백화점 '해롯'은 이집트풍이다. 벽 곳곳에 스핑크스가 새겨져 있다. 전설적인 파라오 람세스의 부조(浮彫)도 여러 군데 눈에 띈다. 그런데 람세스 얼굴은 현존 인물이다. 바로 이 백화점 소유주이자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풀햄의 구단주이고 프랑스 파리 리츠호텔 회장인 알 파예드(72)의 얼굴을 본떴다. 적어도 '돈벌이'만큼은 파라오 부럽지 않은 이집트 출신의 억만장자다.
인터뷰를 꺼리고 성격 괴팍스럽기로 소문난 그를 만났다. 최근 해롯에서 열린 LG 전자제품 전용 홍보관 'i-Gallery' 오프닝 행사가 계기였다. 그는 집에 걸린 LG PDP TV만도 10여개에 최점단 휴대전화도 수십 개씩 사들이는 'LG 마니아'다.
알 파예드는 입지전적인 기업가다. 고향 알렉산드리아의 길거리에서 코카콜라와 바느질 기계를 팔아 몇 푼씩 쥐던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유명 무역상 딸과 결혼해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1966년 브루나이 국왕의 재정 고문이 되면서 큰돈을 굴렸다. 영국엔 1970년대에 발을 디뎠다. 1985년엔 6억1500만 파운드로 해롯을 인수했다. 하지만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느라 정치인들에게 전방위 금품 로비를 펼쳤다. 대형 소송에 휘말렸다. 청렴성을 강조하는 영국에선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영국 왕실까지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파예드의 아들 도디와 왕세자빈이었던 다이애나가 열애에 빠졌고, 97년 자동차 사고로 다이애나와 도디가 함께 숨진 것.
"다이애나는 날 '아버지'로, 난 그 아이를 '딸'이라 불렀어요.(다이애나와 찰스 왕세자 사이의 자식) 윌리엄과 해리 왕자도 나를 좋아했고. 도디와 다이애나의 결혼반지는 다이애나가 직접 골랐죠. 13만 파운드(약 2억4000만원)짜리였는데, 그 열 배, 백 배도 해주고 싶었어요. 사고난 날 도디가 다이애나에게 프러포즈하기로 했다고요! 그걸 알고 (다이애나의 전 시아버지인) 필립공이 얼마나 화를 냈는지 아십니까?"
그는 "요즘도 억울해 미칠 것 같다"며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부 영국 언론으로부터 '파예드가 죽은 다이애나를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의혹을 받는 것도 화난다고 했다.
파예드의 사무실 벽엔 다이애나와 도디가 활짝 웃고 있는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파예드는 때로 하염없이 벽을 바라보거나 도디의 무덤에 가서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한다. 정말 그립다고 했다.
파예드는 영국과 이집트를 사랑하지만 정작 둘 모두에게 버림받은, 어쩌면 불운한 '경계인'이다. 영국 시민권은 끝내 받지 못했다. 하루 10만명 이상이 찾는 '관광 명소' 해롯을 통해 지금까지 세금 수십억원을 내고, 여러 자선 단체를 만들어 1년에도 수십, 수백억원씩 기부를 해도 소용없었다. 일각에선 '다이애나사건'에 대한 '괘씸죄'라고 분석한다. 영국에 정이 떨어진 그는 2년 전 집을 스위스로 옮겼다.
백화점을 '리틀 이집트'로 만들었을 만큼 모국을 그리워하는데, 정작 이집트에선 '영국 편향주의자'라며 그를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가 파예드'에겐 아직 람세스 같은 정열이 넘쳤다. 일흔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그의 실제 나이는 76세로 알려져 있다)로 힘찬 목소리로 "요즘도 새벽까지 난 세계에서 밀려든 유명 브랜드, 신제품을 일일이 검토하고 성능을 비교해 봅니다. 날 평범한 사람과 비교치 마세요"라고 말한다. 축구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프리미어리그에도 한국인 선수가 있죠? 박지성, 맞죠? 내 홈구장에서 아주 끝내주는 경기를 했죠. 감탄했어요. 한국은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국가예요. 경제든 뭐든. 한국이 좋아요. 나 못지않게 아주 열정적이거든요."
파예드는 자신이 출연한 한 TV 프로그램 DVD를 즉석에서 선물해 줬다. 2~3분간만 하자던 인터뷰가 20분을 넘겼다. 계속 복도에 선 채였다.
(런던=최보윤특파원 spic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