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이 남자와 매일 밤 한 침대에서 잠들 수 있을까?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김영수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느슨한 포즈로 깍지 낀 자세는 섬세한 데 없이 뭉툭한 손가락 생김새를 무방비로 노출했다. 가느다란 털 몇 가닥까지 드문드문 나 있다. 저 손가락이 내 몸의 모든 곳을 척척 더듬어대는 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평생?

이 사람을 데리고, 부모님에게 인사 드리러 가는 상상을 해본다. 두 분은 내심 '우리 막내가 9회 말 역전홈런은 못 쳤어도 끝내기 안타는 날렸군'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내쉴 게 분명하다. 인생이 포커 판이라면, 김영수는 내게 남겨진 몇 안 되는 패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평범하게 사는 인생이 가장 바람직한 거라고, 요즘엔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숨이 턱 막혔다.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자세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들으니 그다지 내세울 만한 인생관은 아닌 것 같다.

3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서울에서 ktx를 탔다면 부산에 도착했을 것이고, 인천과 상하이를 왕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멀리까지 왔다는 느낌은 없었다. 각자의 커피 잔은 진즉에 비어버렸고 화장실도 한 번씩 다녀왔다. 누구든 먼저 일어나자고 해도 될 시점이었다. 남자가 불쑥 물었다. "뭘 좋아하세요?" "네?" "식사하러 가셔야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요." 인생의 조커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다른 남자와 약속이 있다고 고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림=권신아

김영수로부터 최소한 저녁을 사주고 싶어할 정도의 점수는 얻고 있다는 확신이 왔다. 그래. 오은수, 아직 죽지 않은 거야. 쾌재를 불러야 마땅하건만 혀끝에 쌉싸래한 맛이 감돌았다. 어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태오를 바람맞히고 김영수와 저녁을 먹으러 갈 것인가? 재인이라면 두 번 생각도 안 하고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약속시간을 한 시간도 안 남겨두고 취소하는 건 큰 결례다. 유희라면 "조금이라도 더 섹시한 남자랑 먹어" 라고 충고할 것이다. 나는 오은수다. 어느 쪽의 기회비용이 더 큰지 판단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네가 진정 원하는 게 뭐야?"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저는, 그러니까, 어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김영수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내장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길이었다. "친구 아기, 돌잔치가 있어요." 아, 하나마나한 궁색한 변명이다. 그는 현금으로 계산을 치렀다. 건물 밖으로 나와, 늘어서 있는 택시가 아니라 그의 자동차에 올라탄 건 죽어도 내 뜻은 아니었다. 내 잘못이라면 "어느 쪽으로 가시죠?" 라고 묻는 맞선남의 호의에 곧이곧대로 대학로라는 목적지를 밝힌 것뿐이다. 가뜩이나 식사 요청을 거절해서 미안하던 차에, 반색을 하며 데려다 주겠다는 남자를 어떻게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 정도로 똑 부러진 성격이었다면, 인생살이가 일곱 배는 더 수월했을 것이다.

김영수는 은색의 중형차를 몰았다. 전국 방방곡곡 어딜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차였다. '튀지 않음' 을 모토로 살아가는 30대 중후반 남성에게 잘 어울렸다. 밀폐된 공간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으니 내가 이 사람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어색한 실감이 확 다가왔다. 서로 마주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가 카 오디오의 전원을 켰다. 교통방송이었다. 디제이의 호들갑스런 멘트에 이어, 신곡인 듯한 경박한 템포의 트로트곡이 흘러나왔지만 그는 주파수를 변경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의 차를 타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다니. 아무튼 내 삶이 갑자기 살짝 화려해진 것 같다. 평소보다 차가 많이 막혔지만 약속시간보다 20여 분 빨리 대학로에 도착했다. 태오가 설마 벌써 나와 있진 않겠지. 약속장소인 KFC 앞을 50미터쯤 지나서 세워달라고 할 참이었다. 아니, 그런데? 김영수의 차가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정차했을 때 나는 보고야 말았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태오의 모습을.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투명비닐에 싸인 장미꽃 한 송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