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에서 16일 시작된 한 재판에 전 세계 박물관들이 숨죽이고 있다.

피고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게티 박물관의 전(前) 큐레이터 매리언 트루(57). 혐의는 게티 박물관의 고미술품 담당자로 일하면서, 장물인 그리스·에트루리아·로마시대 예술품들을 사들였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검찰은 이번 재판을 "미술품 밀수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이정표로 삼겠다는 태세다. 과거의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한 박물관업계는 그래서 떨고 있다.

◆칼 빼든 이탈리아

'지금도 땅을 파면 예술품이 나온다'는 이탈리아 정부는 최근 고미술품 밀매를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며 척결 의지를 보여왔다. 경찰에는 특별수사부까지 설치됐다. 게티 박물관에 대한 수사도 10년 전 시작됐다. 이탈리아 미술상의 창고를 급습했다가 압수한 자료에서 게티의 연루 단서가 포착됐다. 처음 참고인으로 조사받았던 트루는 주 용의자로 바뀌었다. 게티측은 처음엔 결백을 주장했지만 점차 꼬리를 내렸다. 게티 내부자의 폭로에 힘입어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게티측이 사들인 주요 고미술품 중 절반은 출처가 의심스런 것들이라고 보도했다. 결국 게티측은 지난 11일 '선의의 표시'라며 1980~95년 사들인 수천년된 항아리 등 고미술품 3점을 이탈리아에 돌려줬다. 이날 로코 부티플리오네 이탈리아 문화장관은 "미국민은 고고학적 보물 밀반입 뒤에는 종종 조직범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떨고 있는 박물관들

미국의 석유재벌인 장 폴 게티가 1953년에 만든 게티 박물관은 확장을 거듭하며 캘리포니아의 루브르를 꿈꿔왔다. 최근 몇 년간에만 새 작품 구입에 연평균 수억달러를 썼다. 이 과정에서 트루는 2억7500만달러짜리 프로젝트를 맡아 고미술품 매입에 관여했었다.

세계 박물관계는 이번 사건을 '게티 게이트'라 부르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세계 50여 박물관장들의 연례 모임인 '비조 그룹'도 2주 전 모임에서 이 문제로 고심했다고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전했다. 실제 이탈리아 검찰은 전 세계 다른 박물관들도 상당수가 새 소장품 확보 과정에서 '떳떳하지 못한 면모'를 보였다는 단서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의심스런 고미술품들이 미국에만 100점이 넘는다. 현재 수사선상에 오른 곳은 보스턴 파인아츠 박물관과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관련업계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소장품 확장에만 혈안인 박물관들이 작품의 출처나 입수 경위는 외면했다는 것. 미술품 장물 시장은 마약·돈세탁·무기에 이어 4대 암시장으로 커진 상태다. 맥스웰 앤더슨 전 미 미술품전시관장협회장은 "1980년대엔 모험으로 간주되던 일들이 오늘날 범죄행위로 보이는 것"이라고 요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