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성별은 남성, 어린양의 성별은 여성. 남녀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서 밤을 보낼 때 일어날 거라고 상상되는 몇 가지 일들 가운데 하나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원래 그러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은 물 흐르듯 이루어졌다.

더 이상의 세부적인 부분은 말하지 않겠다. 프라이버시는 지켜져야 하니까. 다만 그는 훌륭했다. 여러모로 그랬다. 중요한 순간에 한 박자 쉬면서까지 콘돔을 찾느라 부스럭댄 것만 보아도 그의 침대 매너가 가히 짐작되지 않는가. 더구나 그는 그 순간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귓가에 속삭여주어 나를 감격케 했다.

그림=권신아

"불안하실까 봐요."

좋았다. 다 좋았다. 마무리로, 이마에 살포시 와 닿은 입술의 순연한 감촉도 잊을 수 없다. 평화롭고 나른한 잠이 밀어닥쳤다. 설핏 잠이 들었을까. 음주 뒤의 수면이 대개 그렇듯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잠 속은 짧고 깊은 암흑이었다. 눈을 떴을 때 떠오른 단어는 오직 한 가지였다. '출근!'

한 번만 더 지각하면 죽음인데. 몇 시쯤 된 거지? 눈꺼풀을 네댓 차례 깜빡거린 뒤에야 여기가 내 방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방은 희부연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백을 찾았다. 제일 먼저 전화기를 확인했다. AM 6:05. 아홉 시 출근시간까지는 그래도 좀 여유가 있었다. 지갑도 그대로 있고, 집 열쇠도, 화장품 파우치도 다 제자리에 들어 있다. 잃어버린 건 없구나, 역시 별로 많이 취하지는 않았던 거야, 본능적으로 안심이 되었다. 곧 그런 걸로 안심하는 내가 한심스러워졌다.

홑이불로 아랫도리를 가린 채 벌거벗은 상체로 잠든 남자를 보는 순간, 관자놀이가 깨질 듯 아파왔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차라리 필름이 끊겼다면 좋을 뻔했다. 그것이 토사물의 흔적이든 아니면 수백만 원의 금액이 찍힌 카드 영수증이든 간에, 불과 몇 시간 전 술에 해롱대며 저지른 제 만용의 흔적을 눈뜨자마자 발견하는 건 매우 잔인한 일이니까. 다른 할 일도 없었으므로 일단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가관이었다. 뺨은 사정없이 번들거리고, 아이라이너와 마스카라 잔여물이 범벅된 눈 밑은 시커멓다. 세면대 옆의 비누를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누가 어떤 부위를 씻는 데 사용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손가락 끝에 물을 묻혀 조심조심 눈가 얼룩을 닦아냈다. 욕실 밖으로 나오니 그도 일어나 앉아 있다. 그새 티셔츠를 주워 입은 걸로 보나 우물쭈물하는 표정으로 보나, 그 역시 간밤의 사태에 대해 적이 곤란해 하는 눈치였다.

"가려고요?"

제가 뱉어놓고도 민망한 대사인가 보았다. 얼굴이 벌개지더니 그는 이내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밤에는 미처 못 봤었는데, 대형할인점 속옷 코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남색 트렁크를 입고 있었다. 알뜰한 어머니가 만 원에 석 장들이 묶음을 사다가 서랍 속에 넣어두면 아무 생각 없이 꺼내어 해질 때까지 입는 타입인 듯했다. 팬티를 선물해주거나 적어도 주기적으로 팬티를 보여줄 정도로 친밀한 관계의 여자친구는 없다는 얘기다.

"같이 가요. 데려다 줄게."

예상치 못한 태도였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반말을 써야 할지 높임말을 써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왜, 때때로 형식은 내용을 규정하는 걸까? 어쨌거나 이 남자와 나는 반말과 높임말을 어색하게 섞어 쓸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아니. 나 혼자 가도 돼요. 택시 타면 금방인데 뭘."

"그래도 같이 가요. 집이 어디라 그랬더라?"

"진짜 괜찮다니까. 시간이 일러서, 강북강변 타면 30분도 안 걸려요."

나는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다는 의미인 듯했다. 우리는 조용히 거리로 나왔다. 터무니없이 밝은 햇빛이 이마에 닿았다. 무슨 해가 이렇게 일찍 뜨고 난리야.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묵묵히 제 신발코만 내려다보며 걷던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저기, 우리, 언제 같이, 영화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