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여론조사가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부터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가 한 단계 진전되었던 시기로 시민·소비자의 의견이 점점 더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공공정책의 수립·집행·평가과정에서 시민의 여론을 확인하고 반영하는 일, 그리고 기업의 경영활동에서 고객을 이해하고 소비자의 행태를 파악하는 일, 사람과 사회, 그리고 그 변화를 읽고 의사결정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마케팅·여론조사의 역할이다.

일반적으로 '조사'하면, 숫자·통계·분석과 같은 단어들이 연상될 것이다. 자연과학과 다르게 실험을 하기도, 입증을 하기도 어려운 이유는 바로 사람들의 마음 속을 읽고 그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를 파악하고 변화를 예측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복잡한 인간의 마음, 그리고 때론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몇 개의 설문으로 읽어 낼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그 결과물로 뽑아낸 몇 개의 숫자들은 과연 본질을 나타내고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사실 어렵다. 그러나 특정한 개인 한 사람을 다 설명하진 못하더라도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생각은 정확하게 드러내 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힘은 조사의 과학성에 근거한다. 모집단을 가장 대표하는 표본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한다면, 모집단 전체의 생각과 행동을 추정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기법과 통계적 분석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인간에 대한 이해, 사회에 대한 통찰력이 없다면 사람들의 속마음을, 사회현상의 본질을 읽을 수 없다. 대학시절 은사님은 모든 사회과학도의 바탕은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이라고 하셨다.

최근에 로알드 달의 '맛'을 읽었다. 소설가 성석제는 "로알드 달은 철두철미한 프로다. 그에게는 허술한 작품이 없다.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소설의 서열을 매기라 한다면 나는 로알드 달의 소설을 다섯 손가락 안에 놓겠다"라고 추천한 바 있다. 로알드 달은 1916년 영국에서 태어나 2차 대전 때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였으며, 종전 이후 미국에서 작가로 등단하였다. 이 작품집에 나오는 인간들은 하나의 일관된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 나름으론 매우 철두철미하게 상대방을 공략할 계획과 준비를 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꾀(전략)에 빠져서 파멸을 맞이하고야 만다.

경쟁이 극심한 상황에 처한 현대인의 전형을 인문학적 감수성으로 잘 포착하고 있다. 이런 이해를 토대로 사회과학적 분석을 시도할 때 비로소 좀더 살아 있는 데이터를 만들어 내지 않을까?
(이상경·현대리서치연구소 대표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