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의 영광군 백수읍의 한 마을. 대낮에 당산 나무아래서 '인민 재판'이 벌어졌다. 우익에 가담했던 박씨의 큰 집 일족이 숙청당한 후, 박씨 가족 차례가 된 것이다. 다행히 죄가 없으니 살려주자는 쪽으로 흘렀다. 박씨 가족은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일가족을 모두 죽여야 보복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서 다시 끌려가 학살당했다.
1952년 공보처에서 작성한 좌익에 의한 민간인 피살자 명단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 6만 명 중 전남이 약 4만 3500명이고, 그 중 절반에 가까운 2만 1225명이 영광에서 나왔다. 영광 지역의 학살은 1950년 9월 중순에서 11월 사이에 집중됐다. 인민군들은 7월 23일 영광에 들어왔다가 9·28 서울 수복 후 퇴각했다. 하지만 정작 이 지역은 1951년 2월에야 수복됐을 정도로 군경의 진입은 늦었고, 그 사이에 "한 집안의 씨를 말렸다"고 할 정도로 학살은 잔혹했다. 김해 김씨 집성촌으로 60가구가 살던 염산면 장동 마을에선 14가구 80명의 김씨들이 지역 좌익에 의해 학살됐다. 장동과는 달리 이웃의 축장 마을에선 지역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하나 밖에 없었다. 특히 각성바지 마을인 이 곳을 이끌던 파평 문씨들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들은 '드러내놓고' 좌익 편에 서지 않고 '중용을 지켰기' 때문에 살았다고들 했다.
학살이 자행됐다.
이 책은 6·25 와중에 다른 지역에 비해 지역 좌익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가 유달리 많았던 영광과 강진, 영암 등 전남 지방의 폭력과 학살에 대한 기억을 정리한 것이다. 김경학 전남대 인류학과 교수를 비롯, 박정석(인류학), 표인주(민속학), 염미경(사회학), 윤정란(역사학) 등 연구자 5명이 이 지역 주민들의 구술을 토대로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체험을 복원해낸다.
증언자들은 대부분 70~80대. 20대 안팎에 6.25 전쟁을 직접 겪은 이들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체험으로 그 시절을 증언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다. 이들은 전쟁이라는 극한상황 속에서 이념뿐 아니라 개인과 집안간의 사소한 원한과 보복에 대한 우려가 학살을 낳았다고 증언한다.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발언이 대학교수의 입에서까지 거리낌없이 나오는 요즘, 밑바닥에서 폭력과 학살을 체험한 이들의 증언은 한층 소중하다.
무참한 학살극의 와중에서도 '기적'같은 관용이 있었다. 영광군 백수면의 한 마을 사람들은 수복 직후 백수면 대한청년단장 자격으로 경찰과 함께 마을에 돌아온 박씨를 두려워했다. 그의 가족과 큰 집·작은 집 식구 27명이 좌익에 의해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요행히 그만 서울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그는 학살에 관련된 마을 사람들을 찾아 보복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구해줬다. 마을 사람들은 2004년 공덕비까지 세웠다.
좌익 쪽에도 학살을 막은 사람이 있었다. 염산면 유격대 부(副)대장으로 활동했던 김○△씨. 마을 사람들은 그를 불필요한 학살을 막은 사람으로 기억했다. 거물 좌익이었던 그는 체포됐으나, 마을 사람들이 정부에 감형을 요청했다. 20년간 복역한 끝에 고향에 돌아온 그는 조용히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이런 미담(美談)은 예외적이었다. 자신과 가족을 살리기 위해, 또는 보복이 두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고, 침묵했다. 지주에 속하거나, 우익으로 몰려 가족의 안위가 위태롭게 될 경우에는 오히려 좌익에 가담해 앞장서기도 했다.
책은 학술 논문집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읽어낼 수 있다. 그 엄혹한 시절을 몸으로 살았던 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은 전쟁의 상흔과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