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재판’ 앞에 선 ‘학살자’는 마지막 남은 여유를 보였다. 사담 후세인(68) 전 이라크 대통령은 19일 코란을 손에 들고 수도 바그다드 중심부의 안전지대(그린존) 내에 마련된 특별 법정에 들어섰다. 2003년 12월 고향인 티크리트 농가의 지하 토굴에서 미군에 체포된 지 근 2년 만이다. 그는 1982년 7월 시아파 거주지인 두자일 마을의 주민 143명을 집단 학살한 혐의로 이번 법정에 섰다.
재판은 예정보다 2시간쯤 늦은 정오(현지시각)에 시작됐다. 희끗한 턱수염에 다소 여윈 듯한 후세인은 짙은 회색 양복과 흰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법정에 들어섰다. 방탄복을 입은 두 명의 이라크 병사가 그의 팔을 잡고 자리로 인도했다. 피고석에 선 후세인에게 판사가 이름을 밝히라고 요구하자 그는 답변을 거부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당신은 이라크인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누구인가. 판사는 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달라. 나는 이라크 대통령으로서 헌법상의 권한을 갖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판사의 권한을 준 주체를 인정할 수 없다. 이 법정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이 법정에 답할 것을 정중히 거부한다."
재판장을 맡은 쿠르드족 출신 리즈가르 모하메드 아민(57) 판사는 서너 번 미소를 지으며 후세인에게서 대답을 끌어내려 노력했으나 계속되는 후세인의 공세에 이마를 만지며 곤혹스러워했다. 끝까지 답변을 거부한 후세인은 자리에 앉은 후 함께 기소된 측근에게 "평화가 함께 하기를"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여유까지 보였다.
후세인 다음으로 피고석에 선 전 부통령 타하 야신 라마단도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나는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말한 것을 다시 한 번 말한다."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 6명은 순순히 이름을 밝혔다.
인정 신문에 이어 다시 피고석에 선 후세인에게 판사가 "미스터 사담, 당신은 유죄입니까 무죄입니까"라고 묻자 후세인은 곁에 두었던 코란을 다시 손으로 잡았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다. 나는 무죄다."
3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재판은 후세인이 이끌던 바트당의 지휘 본부로 쓰인 대리석 건물에서 열렸다. 흔히 '그린존'으로 불리는 안전지대는 이라크 정부청사와 의회, 미국 대사관이 위치한 곳으로 3m 높이의 방탄벽에 둘러싸여 있으며 험비차량들과 탱크가 주위를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
재판은 관영 이라크방송 등을 통해 실제 진행시간과 30분 시차를 두고 방송됐다. 방청석에 앉아 재판을 지켜본 아흐마드 찰라비 이라크 부총리는 "나는 오늘 매우 행복하다. 수년 간 이 날을 기다려 왔다"고 말했다.
세계의 시선이 쏠린 재판은 변호인단의 요청으로 다음달 28일까지 휴정됐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후세인 변호사인 칼릴 알 둘라이미는 18일 후세인을 접견한 후 "그는 매우 매우 사기가 충천해 있다. 무죄 선고를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변론 준비를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며 재판 연기를 요청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