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서(22)는 왠지 하늘거리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올 것만 같았다.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홀로 매표소를 지키던 은아처럼 청초하게, 혹은 '올드보이'에서 다리 난간에 매달려 있던 수아처럼 불안하게.
하지만 인터뷰 장소에 불쑥 들어선 것은 티셔츠 위에 큼직한 '국방색' 점퍼를 곰처럼 껴 입은 선머슴이었다. 한 송이 버섯 같은 단발머리를 옷깃에 둔하게 파묻은 채 멀뚱멀뚱 주변을 둘러 보는 그녀. 7일 개봉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예비수녀 '수경' 역으로, 여러 배우 중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윤진서다.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신비한 이미지 때문에 출연작마다 유독 도드라져 보이던 그녀.
"글쎄요, '신비하다'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런 얘길 많이 듣는데요. '내 생애…'의 민규동 감독님은 저한테 '넌 딱 수경이야! 연기가 필요 없어!' 그러셨어요. 처음부터 절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셨대요. 제 본명이 수경이거든요."
'수경'은 짝사랑하는 아이돌 스타를 쳐다 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병원에 실려 온 그의 바지 속으로 쑥 손을 넣어보곤 "여긴 괜찮네?" 하고 중얼거리는, 어딘가 나사가 풀려도 한참 풀린 여자다. 그래도 윤진서는 수경 역이 마냥 좋은 표정이다. "매번 70~80년대 청순가련형만 했잖아요. '환자' 역 하니까 너무 재밌었어요. 계속 맨발로 다니자고 한 것도 제 아이디어에요!"
실제 윤진서는 이렇다. 툭하면 배낭 하나 메고, 유럽으로 일본으로 '행방불명' 된다. "숙소도 안 정하고 무작정 가서 현지 여관 주인한테 싹싹 빌어 방값 깎고 그래요. 파리에 5주쯤 혼자 지낸 적도 있는데, 구경할 게 너무 많아서 심심할 틈이 없던데요?"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 불편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입꼬리가 자랑스레 치켜올라간다. "제가 실전에 강해서요. 영어·불어·일어 다 여행에 필요한 정도는 해요. 엄마가 저 보고 무인도에 데려다 놔도 잘 살 애래요." 자신만만. 파리 지하철에 노숙자 같은 시커먼 사람들도 있었을텐데 무섭진 않았냐고 떠봤다. 다시 배시시 웃는 그녀. "제가 그 사람들 중 하나였어요."
그런 그녀가 여행보다도 더 열광하는 게 있으니, 바로 영화다. 어릴 때부터 주말이면 비디오를 3개씩 빌려다 봤다. "제가 하나에 미치면 모든 걸 쏟아 붓는 스타일이거든요. 영화가 끝나면 현실로 덩그러니 돌아 오는 느낌이 들어서 곧바로 딴 영화를 보곤 했어요. 부산영화제 가서 하루에 다섯 편 본 적도 있어요."
요즘도 윤진서는 새벽 3시에 귀가해 6시에 다시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울적하면 꼭 밤새 영화를 본다. 특히 좋아하는 건 프랑스 영화. '올드보이'의 에로틱한 과학실 장면을 별다른 수치심 없이 찍은 것도 프랑스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제가 생각해도 전 좀 엉뚱한 것 같아요. 어떨 땐 한 밤중에도 밖으로 막 뛰어 나가요. 달리다가 숨 차면 잔디밭에 벌렁 드러눕기도 하고…. 어떤 감정이 일어나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로 표출하는 편이에요. 아, 요즘은 런던 가고 싶어 죽겠어요. 김수로 선배님이 거기 뮤지컬 죽인다던데!"
좋아하는 화제만 나오면 '광분'해 헐떡이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도통 알 수 없던' 신비감은 멀어지고, 이런 느낌이 온다. '살아 있다!' 요즘 배우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팔팔한 생명력이다.
"정체불명의 신비감속에 언제까지 본색을 숨길 셈이냐"고 묻자, 윤진서는 "계속 숨겨야 연기를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키득거렸다. 그리곤 우아한 하늘색 드레스로 갈아 입고 빛이 드는 창가 쪽으로 사뿐히 옮겨 앉았다. 어느새 새초롬한 얼굴에 신비감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