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당초부터 힘 있는 기관은 아니었다. 초대 대법원장 존 제이는 뉴욕 주지사가 되기 위해 중도사임했다. 몇 년 후 대통령 애덤스가 다시 그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했을 때 이를 거부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법원은 에너지도, 무게도, 권위도 없다."
이런 상황에 변화가 온 것은 미국 대법원이 스스로의 판결로 위헌 심사권을 확보하고 정치적 독립을 이뤄나가면서부터다.
미국 대법원이 결정적으로 국민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얼 워런이 대법원장으로 들어선 것을 계기로 한다. 흔히 '워런 대법원' 시대라고 부르는 1953년부터 1969년까지는 미국 대법원 역사에서 아주 별난 시기로 꼽힌다. 한국의 법학 교과서에까지 소개되는 여러 기념비적 판결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 '분리하되 평등'이라는 흑백 차별의 법리(法理)를 뒤엎은 판결, 선거구 사이의 인구 불평등이 위헌이라고 본 판결, '미란다 원칙' 등 피의자의 인권을 획기적으로 확장한 일련의 판결들, 공적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 성립 요건을 까다롭게 하여 언론자유를 확대한 판결 등이 모두 워런 대법원의 소산이다. 혁명이 아니라 법원 판결로 세상이 바뀌어 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이끈 워런이 대법원장으로 임명됐을 때 미국 대법원이 진보의 견인차가 될 것임을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 워런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공화당 정치인이었다. 그를 임명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퇴임하면서 "워런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대통령으로서 내가 저지른 최악의 멍청이 같은 실수"라고 푸념했다.
주목할 것은 '멍청이 같은 실수'를 저지른 게 아이젠하워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대법관이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과 다른 입장을 취한 예는 한두 번이 아니다. 전설적인 대법관 홈스는 독점금지 사건에서 임명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뜻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6·25전쟁 중 제철공장을 정부 관리하에 두려고 한 트루먼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대해, 트루먼이 임명한 4명의 대법관 중 2명이 위헌 의견 쪽에 가담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서는 닉슨이 임명한 4명의 대법관 가운데 3명이 닉슨에 대립하여 비밀녹음 테이프 제출을 명령했다. 이처럼 미국 대법관들은 일단 임명되고 나면 임명자를 포함한 누구로부터도 정치적 독립을 내세워왔다. 중요한 것은 더 나아가 국민들 역시 대법관들의 이런 태도를 기대하고 요구해왔다는 점이다.
한국의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의 부상과 함께 정치적 비중이 약화된 감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선거재판이나 정치인 비리 사건이 아니라도 그 정치적 영향력은 결코 경시할 수 없다. 곧 새 대법원장이 취임한다. 무엇보다도 새 대법원장은 앞으로 9명의 대법관 제청권을 가진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당장 오는 10월에 3명, 11월에 1명의 대법관 교체가 있다. 이제 한국 대법원에 진보의 바람이 불어닥칠 것인가. 그것은 태풍처럼 휩쓸 것인가 아니면 미풍에 그칠까.
일찍이 토크빌은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미국의 법률가들이 통치 과정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민주주의의 과잉에 대처하는 가장 강력한 안전장치다." 진보의 시대를 열었던 워런 시대는 미국 대법원 역사에서 어디까지나 예외적 시대였다. 법원이 나서야 할 때가 있을 테지만 지금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민주주의의 부족인가 과잉인가.
보수 일색의 대법원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진보 지배의 대법원이야말로 재앙일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법부의 정치권력 견제 역할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제청하여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새 대법원장은 중도(中道) 성향으로 알려져왔다. 앞으로의 대법원 구성에서 누가 주도권을 쥘 것인가. 대법원장인가, 아니면 대통령인가.
(양건 · 한양대 교수·헌법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