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성균관대 교수·한국행정학회장

사람들은 과거의 역사를 확인하고 체험하기 위해 사적지(史跡地)를 보존하고 또 찾아간다. 중국의 하얼빈역은 우리에게 매우 상징적인 역사의 현장이다. 하얼빈역 하면 '대한국인 안중근(大韓國人 安重根)'과 단지(斷指)된 손자국을 떠올리고 더운피가 끓는 것이 한국인이다.

한국행정학회 대표단은 최근 중국행정관리학회의 초청으로 하얼빈의 흑룡강대학에서 개최된 학회에 참가하였다. 일행은 학회 일정을 마치고 벅찬 가슴으로 하얼빈역을 찾아갔다. 그런데 하얼빈역 어디에도 안중근 의사에 관한 언급이나 표지물은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를 안내한 흑룡강대학의 안성일 교수(조선족)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역무실의 관리자가 안 의사를 잘 알고 있었지만, 과거에 있었던 의거 현장 표지물이 역 증축 과정에서 없어져 버렸다는 설명이 고작이었다.

우리는 착잡한 심정으로 역무원이 안내하는 의거 현장을 둘러보았다. 96년 전 동아시아를 진동시켰던 총성은 간 데 없고 역사의 현장은 공허 속에 침묵하고 있었다. 오직 국권회복과 동양평화를 위한 충정으로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한 뒤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던 당시 31세의 우국청년 안중근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안 의사가 망국의 한을 안고 만주 벌판을 떠돌며 그토록 염원했던 국권회복이 이루어진 지도 어언 60년이 지났건만, 아직 우리는 그의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의거 현장에 작은 표석 하나도 마련하지 못했다. 착잡함은 허탈감을 넘어 분노로, 다시 부끄러움으로 내려앉았다.

다음날 하얼빈을 떠나기 전 오찬 모임에서 흑룡강대 교수가 하얼빈에 대한 인상을 묻기에 "어릴 때부터 무척 동경해 왔던 곳인데, 막상 와보고는 허탈감에 빠졌다"고 했더니 의아한 표정이었다. 전날의 하얼빈역 방문 소감을 이야기하고 나니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에 관한 표지물을 남기지 못한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도 역사적 교훈을 저버리는 처사라고 했더니 공감을 표시했다. 그 자리에서 중국행정관리학회측은 이 문제를 중국정부에 공식적으로 건의해 주기로 하였다.

금년은 광복 60주년이다. 기념사업으로 하얼빈역 의거 현장의 사적화(史跡化)만은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의거 96주년인 10월 26일을 기해 일단 소박한 표지판이라도 남기는 것이 국민적 소망일 것이다. 중국측에도 명분이 있는 일이니 우리 정부가 적극 나서주기 바란다.

더구나 하얼빈은 악명 높은 일제의 731부대가 세균무기 개발을 위해 인간 생체실험의 만행을 저지른 곳이다. 중국 당국은 지금도 그 현장을 박물관 형태로 보존해 놓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현장 표지물은 한·중뿐 아니라 세계인 모두에게 평화를 위한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될 것이다.

광복 60주년을 맞았지만 남·북 분단이라는 식민통치의 상흔이 가시지 않는 상황에서 안 의사가 염원했던 진정한 독립과 평화는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이를 위해 '안중근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까지 '안중근 없는 하얼빈역'을 찾아가야만 하는가?

(김현구·성균관대 교수·한국행정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