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문화부 부장대우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짐 길레스피 감독의 1997년 작 공포영화는 제목이 유행어가 됐다. 음주운전으로 불의의 사고를 일으킨 네 명의 젊은이들은 시체를 감춘 뒤 무덤 속까지 비밀을 가져가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이듬해 여름 이들에게 편지 한 장이 날아든다. 이어 어부 복장을 하고 갈고리를 손에 든 복수의 살인마가 점점 다가온다.
납량극은 이제 시작됐다. 국민은 온통 투명한 유리상자에 갇힌 피에로가 돼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문턱이 되면 국가는 틀림없이 어떤 그룹의 국민들에 대해 "우리는 당신이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고 말할 것만 같다. 갈고리를 들고 있지는 않겠지만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진다.
복잡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간단히 말해 불법 감청은 국가가 저지르는 가장 질 나쁜 범죄 중 하나다. '최강 IT 국가'라는 자부심과 함께 지구촌 구석구석을 '모바일 메이드·인·코리아'로 덮으면서 국가경쟁력의 꽃봉오리로 애지중지 키워왔건만, 선두에 섰던 그들의 입이 "휴대폰도 도청했다"고 고백하는 것을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다.
당시 청와대 주인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느냐 모르고 있었느냐를 따지는 일은 어쩐지 습관적인 정치쇼로 비친다. 국민의 눈에는 '정치적으로 옳으냐(politically correct) 그르냐'를 따지는, 시간끌기로밖에 안 보인다. 국가가 국민을 엿듣는 일은, 내각이 총 사퇴해도 모자랄 만큼 부도덕했다.
청년의 나이로 숨진 요절시인 기형도는 말했다.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이 문장은 '질투는 나의 힘'이란 시의 끝부분이다. 이 시는 같은 이름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지면서 한동안 유행어가 됐다. 이미 스스로 쥐고 있는 권력을 미친 듯이 탐하면서도 단 한번도 제 국민을 사랑하지 않는 요즘 국가를 기형도의 시로 패러디한다면 '비밀은 나의 힘'이다. 능력 있는 국가는 라이벌 국가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지만, 부도덕한 국가는 오로지 제 국민의 비밀을 갖고 논다.
'현재의 국가'는 모든 것이 '과거의 국가'가 한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되도록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유혹을 느낄 것이다. 과거사를 잘라낸 뒤, 그것을 밟고 올라서야만 '현재의 국가'는 선동의 효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거의 국가'들도 이런 비슷한 일이 불거질 때마다 불과 몇 달 전의 과거까지 잘라내려고 했다.
'과거를 잘라내는' 일은 매우 강력한 대(對)국민 선전전(宣傳戰)을 수행해야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다. 이왕에 과거와의 전쟁을 시작했다면 이겨야 할 것이고, 이겨야 한다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그때 자기 기만이 싹튼다. 도청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도청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생겨날지 모른다.
'독선과 아집의 역사'(자작나무)라는 책은 "자기 기만의 원천을 이루는 우둔함은 통치에서 대단히 큰 역할을 하는 요소"라면서 "우둔함은 또한 경험에서 배우기를 거부한다"고 말하고 있다. 17세기의 스웨덴 정치가 악셀 옥센셰르나 백작은 일생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유언했다. "내 아들아, 이 세상을 얼마나 하찮은 자들이 다스리는지 똑똑히 알아두거라."

(김광일·문화부 부장대우 ki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