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카야'(居酒屋)라고 불리는, 샐러리맨들이 즐겨 찾는 일본의 포장마차에는 손님들 머리 위로 빨랫줄 같은 줄이 걸려 있다. 줄에는 주판 알처럼 구슬이 꿰어 있는데, 손님들은 보통 낱잔으로 파는 정종(일본식 청주) 한 잔을 비울 때마다 구슬을 한 개씩 옮겨 마신 술잔 수를 표시한다. 자기 술값을 정확하게 계산해 각자 낸다는 이른바 '와리칸'(割り勘) 문화의 산물이다.
▶버블(거품)이 한창이던 1980년대 말~9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선 한동안 '와리칸'이란 말을 듣기 어려웠다. 기업이 뿌리는 눈먼 접대비 덕분에 열도 전체가 흥청거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버블의 진앙지인 도쿄 가부토조 증권가는 특히 심했다. 증권사 직원들이 회사 카드로 호텔에서 호화판 단체회식을 수시로 열고, 1인당 10만원(1만엔)짜리 점심을 먹는 것도 당연시되던 때다. 그러다 97년 대장성 공무원의 독직(瀆職) 사건이 터져 과잉접대 문화에 철퇴가 가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와리칸'의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 재계가 엊그제 윤리경영을 실천하기 위해 '더치페이(Dutch Pay) 문화'를 확산시키기로 결의했다. 회사 안팎의 공식, 비공식 모임이나 협력·납품회사와 업무 협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 가운데 자기 몫을 각자 나눠 내자는 것이다. 네덜란드식 '더치페이'든 일본식 '와리칸'이든 기본 정신은 '남에게 부담을 주지 말고 나도 피해를 보지 말자'는 것이다.
▶업계에선 이미 신세계가 올해 4월부터 '각자 내기' 운동을 시작했다. '신세계 페이' 캠페인인데, '계산은 나누고 情(정)은 모으고'란 슬로건이 가슴에 와 닿는다. 7년 전부터 윤리경영을 외쳐온 구학서 신세계 사장은 "국내 기업 중에 아직 윤리경영을 제대로 하는 곳이 없다. 신세계도 100점 만점에 10점도 안 된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는 한국 사회 특유의 온정주의가 윤리경영의 확산을 가로막고 있다고 진단했다.
▶외국의 경우 기업의 접대문화는 스포츠 관람에서부터 체험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미국 월가(街)에선 야구나 농구를 보면서 접대하는 게 일반적이다. 접대비용은 보통 100~200달러 수준이다. 영국엔 아예 접대를 전문적으로 대행해주는 서비스 회사가 등장했다. 기업의 의뢰로 자동차 경주, 윔블던 테니스 등에 고객을 초대하는 것이다. 기업의 접대 문화가 바뀌면 사회 전체의 접대 문화도 바뀐다. 일본 사례가 그걸 보여준다. 재계의 더치페이 운동이 구호로 끝나지 않고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이준 논설위원 jun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