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정치부장

국가정보원 도청 파문은 커져가지만 그 양상은 다른 사건 때 보아온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첫째, 이번에도 결국은 사건이 정치 게임으로 변질됐다. 국정원이 "DJ 때도 도청했다"고 발표하자 DJ가 분노했다. 아직 DJ는 정치구도를 바꿀 힘을 갖고 있다. 그 파장을 각 정파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여당 내 구파(도청 파문에 관련됐거나 테이프에 이름이 나올 만한 사람)와 신파(당시에 그럴 위치가 아니었던 사람)가 분화되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 검찰이 DJ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보면 그림이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둘째, 주역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DJ에게 치명타를 안긴 국정원 발표는 미리 노 대통령에게 보고됐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노 대통령은 도청 테이프 공개 방침도 결정했다. 목표가 무엇이든, 연정론 여론몰이에 실패한 대통령이 이번엔 판을 흔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셋째, 이 정치게임을 지배하는 정서는 불신과 피해의식이다. 국정원이 "DJ 때도 도청했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여권의 한 인사는 "한나라당이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우리가 선수(先手)친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도청 테이프가 공개돼서 유리할 것도 없는 한나라당이 "공개할 테면 하라"고 나오는 것도 밀리지 않겠다는 피해의식의 소산이다. 이런 불신과 피해의식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배는 피차간에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흘러가고 있다.

넷째, 이 판에 법치주의는 안중에도 없다. 여당이 도청 테이프를 공개하겠다면서 만들려는 특별법은 원래 불법이던 것을 합법으로 뒤바꾸는 내용이다. 이렇게 되면 법이 있어 무슨 소용인가. 불법도청, 불법선거, 불법자금, 불법…시리즈는 이렇게 법을 무시하는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다섯째, 또 과거사 문제다. 과거에 잘못된 일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지만, 이렇게 만날 과거사 파헤치기로 세월을 보내도 되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여섯째, 정부의 공식 '거짓말'이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고 통화하십시오"라는 정부 차원의 거짓말 신문광고는 오랫동안 정부의 신뢰에 타격을 가할 것이다. 그 독성이 얼마나 큰지도 우리는 두고두고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일곱째, 돈이면 정말 무슨 짓이든 하는 세상이다. 식당 주인들이 지체 높은 단골의 약속시간을 정보기관에 알려주고 도청할 수 있도록 해줬다. 정보기관에서 돈 주고 뒤 봐주며 관리한 대가였다. 사실 식당서 도청한다는 얘기는 전에도 있었다. 주인에게 물어보면 "무슨 소리냐"고 펄쩍뛰었다. 이번에 보니 그게 거짓말이었다. 누구는 자기 기업 소유 식당에서 도청당했다는 설(說)까지 나도는 판이다. 도청 테이프가 유출된 것도 결국 돈 때문이었다.

여덟째, 이번에도 단상(壇上)엔 인영(人影)이 무(無). 도청 한 사람들은 책임 안 지려고 잠수하고, 도청 당한 사람은 추한 뒷모습이 드러나 사라졌다. 서로 오르려던 화려한 무대 위에 지금은 사람 그림자가 안 보인다. 한두 번 본 모습이 아니다.

아홉째, 역시 우리나라엔 국민적 정보기관이 없었다. 국가 안보와 관련없는 문제로 사인(私人)들 간의 대화를 도청했다면 이미 진정한 정보기관이 아니다. 선진국 정보기관은 '미림팀'이 한 것보다 더 한 일도 한다. 그러나 안보를 위해서 한다. 그런 믿음과 존경이 있다. 우리 정보기관엔 아무것도 없다.

열번째, 또 본질은 뒷전이다. 어쨌든 정보기관은 있어야 한다. 미국 정보기관이 주요 우방국인 터키의 영사관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미국·영국·프랑스·독일도 서로 모두 도청할 것이다. 소련 정보기관은 미국대사관 건물 콘트리트 안에 도청기를 심을 정도였다고 한다. 미국에선 CIA요원 한 명의 신분이 누설된 것을 갖고 대통령 최측근이 흔들거린다. 정보가 없으면 나라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정보기관 문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양상훈·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