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불법도청 조직인 ‘미림’의 전 팀장 공운영(58)씨 자택에서 274개의 도청테이프를 확보한 검찰이 수사의 가속페달을 무섭게 밟고 있다. 재미교포 박인회(윌리엄 박·58)씨 구속과 공씨 조사에 이어 도청테이프 내용을 보도한 MBC 이상호 기자를 주초에 소환키로 했다. 또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등 사건 연루 의혹을 받아온 전 정권 실세들을 대부분 출국금지했다. 그러나 정작 테이프 내용에 등장하는 삼성과 정치권 사이의 돈 거래 여부와 관련된 인사에 대한 조치는 눈에 띄는 것이 없다.
◆도청 및 유출수사로 끝나나
도청자료 유출 수사는 상당 부분 진행됐다. 삼성 자금을 정치권에 전달한 내역이 담긴 도청자료를 MBC에 전달한 박인회씨가 구속되고 박씨에게 자료를 준 전 미림팀장 공씨에 대해서도 이미 구속영장이 청구돼 있다. 이상호 기자까지 조기에 소환하는 것을 보면 검찰은 일단 처벌이 가능한 사안부터 먼저 처리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불법 행위는 도청자료 유포(유출 및 보도)와 삼성그룹을 찾아가 거액을 요구한 혐의(공갈미수)이다.
2단계 수사도 불법 도청팀이 누구에 의해 구성·운영됐는지에 집중된다. 여전히 테이프 내용보다는 이번 도청문제의 주변부를 건드리는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와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 권영해 전 안기부장 등 1994년 미림팀 재건과 이후 팀 운영에 개입 의혹을 받아온 핵심 인사들을 출국금지한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테이프 내용은 수사 안 하나
안기부의 불법도청이 논란이 된 것은 도청조직이 운영되면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것 외에도 도청자료 안에 담긴 내용이 '불법 정치자금'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 부분에 대한 수사 의지는 확고해 보이지 않는다.
테이프에 등장하는 인물인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이건희 삼성 회장 등에 대한 수사계획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수사 순서상 불법도청과 자료 유포 부분을 먼저 하겠다고 했지만, 그 이후 테이프 내용에 대한 수사로 확대할지는 아직 분명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홍석현 주미대사와 이 본부장 등에 대한 출국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는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와 법조계에서는 '도청 내용' 수사도 병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
◆274개 테이프 내용조사는
추가로 274개의 도청테이프가 나타남에 따라 여기에 등장하는 ‘범죄행위’에 대한 수사 여부가 테이프 공개 문제와 맞물려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형평성 등의 문제로 삼성 자금 부분만 수사하기가 곤란하다면 다른 테이프에 등장하는 범죄까지 수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반면 274개의 테이프 내용 전부를 공개할 경우 사회에 미치는 파장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언론사 보도 경위까지 수사하는 검찰이 그 보도를 통해 드러난 정치권과 재벌 등의 범죄 의혹을 방치한다면 검찰 또한 거센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