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강혜정

처음엔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깡총한 단발에 직사각형 뿔테 안경이 그녀 얼굴의 절반을 가린다. 취재수첩 앞에 놓인 파란색 볼펜을 물끄러미 지켜보더니, “파란색은 검은색보다 덜 공격적인 색깔이죠, 그렇죠?”라며 엉뚱한 첫마디를 꺼낸다. ‘웰컴투 동막골’에서 ‘백치 소녀’ 여일 역할을 맡은 강혜정이다. 맞아. 스크린 안에서 그는 ‘덜 공격적’이다 못해 ‘공격’이라는 단어 자체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캐릭터였지.

“제가 원래 좀 칠렐레 팔렐레 하는 성격이 있거든요. 박광현 감독님이 아이처럼 노는 제 모습을 우연히 보셨는데, 아마 여일 캐릭터에 어울린다고 판단하셨나봐요. 동심(童心)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왜 숨바꼭질 놀이 ‘얼음, 땡’이나 ‘나 잡아봐라~’하고 놀던 그 때…”

대중들에게는 아직 조승우의 여자친구로 더 익숙할 지 모르지만, 스물세 살 강혜정은 충무로의 같은 또래 기대주 중에서도 가장 앞 줄에서 뛰고 있다. 아버지(최민식)인 줄 모르고 근친상간을 범하는 ‘올드보이’의 횟집 소녀 미도, 결정적 순간에 남자(박해일)를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연애의 목적’의 미술 교생 홍, 그리고 귀 옆에 꽃 한 송이 꽂고 다니며 국군과 인민군 사이의 벽을 허무는 ‘웰컴 투 동막골’의 여일. 관객이 ‘여배우’에게 기대하는 달콤한 판타지를 정면으로 혹은 슬그머니 외면하는 캐릭터만 골라 덤빈다.

“칭찬 많이 듣고 있죠?”하고 호의를 던졌더니 “귀에 듣기 좋은 말이 실제로는 쓸 수 있죠”라고 진지하게 받는다. “자의식이 강한가봐요?”라는 말에 “기복이 심한 거겠죠”라는 답이 돌아온다. 다시 멈칫하자, 그제서야 “까르르~” 웃는다.

‘연애의 목적’촬영을 마친 뒤 강혜정은 집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커피만 마셔댔다.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던 극중 홍의 성격이 현실까지 전염된걸까. 극단적으로 순수한‘백치 소녀’를 연기한‘웰컴투 동막골’이후 그는 집 밖으로 나가고 싶다. 알 없는 뿔테 안경으로‘변장’하고. / <a href=mailto:rainman@chosun.com><font color=#000000>채승우기자</font><

"저, 욕 많이 먹어요. 무리나 단체에는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또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너무 정확하게 나누거든요. 영화하는 이유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 연기를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게 저에게는 절대로 작은 이유가 아니에요."

탐색전이 끝난 듯, 장난기와 호기심이 가득한 눈망울로 폭포수처럼 말들을 쏟아낸다. 4남매 중 셋째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고향 인천의 어린 시절, 단체생활을 버거워하다 입학 한 달 만에 스스로 포기한 대학(서울예대 연극과), 김난주와 양억관 등 번역자 이름으로 판단하는 일본 소설 선택 기준…. 대화는 종횡무진으로 번져나가고, 강혜정의 눈망울은 점점 더 또렷해진다.

'나비'(2001)로 데뷔했으나, '올드 보이' 때도 오디션을 거쳐야 했던 그녀. 횟집 사시미칼을 빌려들고 등장해 미도 역할을 따냈다는 이 되바라진 신인은 이제 밀려드는 시나리오에 파묻힌 행복한 배우가 됐다. 시나리오 선택기준을 묻자, '후각'과 '촉각'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길을 가다 김치찌개 냄새가 나면 알 수 있잖아요. 음, 이건 조미료 안 들어간 담백한 찌개구만. 시나리오도 마찬가지예요. '웰컴 투 동막골'은 제목에서부터 적(敵)이 없을 듯한, 말끔한 냄새가 났어요. '연애의 목적' 시나리오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책 안의 활자들을 읽다 보면, 감독님이나 작가가 얼마나 여러 번 매만졌는가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구요."

그의 '애늙은이' 같은 대답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10초 안에 답변하는 게 규칙"이라며 지난 1주일 동안 가장 행복했을 때와 속상했을 때를 물었다. 몇 초간 끙끙거리더니, "행복했던 건 그와 함께 있었을 때, 슬펐을 때는 그가 옆에 없었을 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가 영화를 봤는 지 확인한 뒤, "승우씨가 뭐라던가요?"라고 물었다. "저랑 같이 연기한 선배님들에게 정말 고맙다고, 문자메시지라도 보내드리고 싶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핸드폰 번호들 쭉 알려줬어요."

인터뷰 내내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던 강혜정이 처음으로 몸을 외로 꼬며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