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뿔도 녹인다는 대서(大暑)가 일주일이 지났는데 무더위는 여전하다. 땡볕에 숲은 더 울창해지고 무더위에 매미울음소리는 더 요란해지는 것 같다. 만약에 이 무더운 여름날, 시퍼런 숲이 없고 절절한 매미울음소리가 없다면 7월은 얼마나 가난할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나는 신비와 생명력으로 가득찬 자연을 내 생의 스승처럼 여겨왔다. 실패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나를 바꾸고 싶을 때, 다시 살아봐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자연은 내게 선생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살겠다는 작은 의지라도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자연한테 배웠다. 자신에 대한 각성은 그 자체로 이미 빛나는 달성이라는 것을 배운 것도 자연한테서였다.
얼마 있지 않으면, 젊음이 제멋대로 왔다가 조금씩 물러나는 것처럼 매미소리도 잦아질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늘은 박인환의 시 '전원'을 읽어보자.
'홀로 새우는 밤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바람은 모여들고… 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내 가슴보다도 더욱 쓰라린 늙은 농촌의 황혼. 언제부터 시작되고 언제 그치는 나의 슬픔인가. 찾아든 고독속에서… 바람소리를 사랑하다 창을 부수는듯 별들이 보였다. 7월의 저무는 전원… 괴로운 세월은 어디론지 떠났다. 비내리면 떠난 친구의 목소리가 강물보다도 내 귀에 서늘하게 들리고… 부서진 추억을 안고 염소처럼 나는 울었다… 타오르는 연기는 마을을 덮는다.'
20세에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로 시작되는 '거리'라는 시로 시인이 된 박인환. 중학생 때부터 영화광이었던 그는 한국 최초로 '영화평론가협회'를 발족한 영화평론가이며 번역가였다. 그는 또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를 흉내내기 위해 상고머리를 하고 다닌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문단에 여러 화제를 뿌린만큼 시인으론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우한 시인이었다. 그는 특히 프랑스 시인 장 곡토를 정신적 지주로 삼을 만큼 열렬한 팬이었고 장 곡토의 수립광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박인환의 꿈은 '한국의 장 곡토'가 되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였지만 시집은 '박인환 선시집' 한 권밖에 없다. 그 시집의 원제목은 '검은 준열시대'였으나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스팬더의 '선시집'을 본따 '박인환 선시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시집의 서문에 '아내 정숙에게 보낸다'라는 헌사를 썼는데 가난했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만은 따를 자가 없었다. 그의 일화중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는 명동에 있는 술집 '경상도 집'에서 즉흥적으로 쓴 '세월이 가면'에 이진섭이 곡을 부쳐, 나애심이 노래를 부른 사실이다. 그 노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이 되고 있다. 외상술을 마실 때에도 시인답게 '꽃피기 전에 갚을게'란 말을 그의 별명은 '명동백작' '명동의 연인' '명동의 슬픈 삐에로'였다. '아, 답답해'란 마지막 말을 남긴채 31세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떠나기 전 그가 친구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 "돈만 있으면 쌀부터 사두라"고 한 충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것 같은 오늘 아침. 무엇보다 '맑은 가난'이 그립다.
(천양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