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당신의 편지를 오후에 받았습니다' 라고 시작되는 시를 만난다면, 어떤 연애시를 읽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편지라는 내밀한 형식을 통해 한 사람의 간절한 마음이 드러날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아니면, 편지의 내용을 암시하는 비유들을 통해 그 편지에 담긴 전언을 짐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규원의 시는 편지의 내용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편지의 의미에 대해서도 사변적인 발언을 하지 않는다. 시는 아주 투명하고 심플하게 편지지와 편지봉투라는 사물과 그 주변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물론 화자의 의식이 배제된 것은 아니어서 "A4 용지는 단정하고 깍듯했습니다"와 같이 편지에 대한 인상을 담백하고 간명하게 말하고 있다. 두 번 나오는 '그래도'와 같은 접속사는 논리를 펼치지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사물들의 현상, 그것들의 관계와 문맥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면 독자들은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여기 당신 앞에 두 겹으로 하얗게 접힌 A4 용지가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제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그것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되돌려 진다. 무엇도 설명하려 들지 않음으로써, 시는 편지 자체에 대한 감각을 오히려 새롭고 생생하게 한다.
(이광호·문학평론가·서울예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