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초에 갑작스럽게 전남 강진군청의 요청으로 다산과 그 주변인물들이 남긴 자료들을 열람할 기회를 가졌다. '요즘 세상에 진품이 얼마나 되랴' 설마 하는 마음을 품으면서 강진으로 내려갔었다. 하지만 그처럼 많은 자료를, 더구나 공개되지 않았던 것을 누구보다 앞서 배관(拜觀)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산 선생의 필치가 살아 움직이는 서첩들을 펼쳐보며 행복하였다.
발굴된 자료에는 다산 친필의 서첩과 시문이 많았고, 추사 선생과 그 형제들, 다산의 자제와 제자들의 친필 시문 및『목민심서』필사본 완질도 포함됐다. 다산 친필이 많았는데, 세상에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자료도 적지 않았다. 또 내용이 알려지기는 했으나 실물이 처음 공개된 원고본 서첩도 있었다. 예전에 선생의 문집에서 감동적으로 읽은 글의 친필 원고를 보는 반가움과 기쁨은 무엇으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자료 공개에 앞서 지상에서 다산 선생의 고귀한 새 자료를 접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에 포배장으로 엮은 아주 예쁜 서첩이다.
'아리따운 서첩'이라는 제목이
다산의 지적 풍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요염하게 섬세하다…
첫눈에 뜨인 것이『요조첩』(窈窕帖)이다. 다산이 친필로 발문을 쓴 시첩이다. 『여유당전서』에도 실려 있지 않은, 존재가 이번에 처음 알려진 시첩이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에 포배장으로 엮은 아주 예쁜 서첩이다. '아리따운 서첩'이라는 제목이 다산의 지적 풍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요염하고 섬세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혼하는 군보(群甫) 윤시유(尹詩有, 1780~1833)를 축하하는 시첩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리따운 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窈窕淑女, 君子好逑)라는『시경』의 시에서 따다 제목을 삼았다. 내용과 잘 어울리는 멋들어진 작명이다.
군보란 사람은 강진 사람으로 다산을 도운 사람이다. 문집에도 몇 번 등장한다. 그가 석 자나 되는 농어를 들고 와 직접 회를 쳐서 병든 다산에게 술과 함께 대접하여 한때의 고통을 잊게 했다는 시도 보인다. 그런 군보가 나이 서른에 아내를 잃고 바로 그 해 겨울에 재혼했다. 그때 다산의 제자들이 결혼축하시를 써서 하나의 첩(帖)을 만들고, 다산에게 발문을 부탁하여 군보에게 건넸다. 일종의 결혼 선물이다.
시를 쓰고 큰 학자의 글을 받아 예쁜 첩을 만들어 선물한 것이 우선 운치가 있다. 다산은 본래 풍류와 운치를 사랑하는 일면이 있었다. 더구나 초혼이 아니라 재혼인지라 장난기 어린 선물을 넉넉히 용인했을 것이다.
먼저 한 장에 한 글자씩 네 글자를 썼다. 고(枯), 양(揚), 생(生), 이(荑)이다. 해석하면 "말라버린 버드나무에 꽃이 핀다"다. 구차한 설명이 필요없이 나이 들어 젊은 아내를 얻었다는 말이다.『주역』에 나오는 근거가 있는 말이다. 군보가 재혼하니 고목나무에 꽃이 핀 격이라는 익살이 섞여 있고, 회춘(回春)하라는 축하의 의미도 읽을 수 있다.
이 시첩의 중심은 축하시다. 치구(穉 , 정학유), 성교(聖郊, 윤자동), 구보(求甫, 윤종기)와 학래(鶴來, 이청), 자창(子蒼, 미상), 이렇게 다섯이 한 편씩 쓴 시가 차례로 실려 있다. 치구는 다산의 둘째 아들이고, 나머지는 이청을 비롯한 제자들이다. 모두 1809년 당시 팔팔한 20대의 나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흔한 한시의 형식을 쓰지 않고 접련화(蝶戀花), 작교선(鵲橋仙), 호사근(好事近), 일반아(一半兒) 같은 송사(宋詞)와 원곡(元曲)의 형식을 빌렸다. 수련을 받지 않으면 쓰기 어려운 생소한 형식을 구사한 것은 다산 같은 큰 학자로부터 교육받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한국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은 원곡을 사용한 것은 혹시 남녀간의 사랑을 묘사한『서상기(西廂記)』에 심취한 결과는 아닐까?
그 가운데 수제자 이청이 쓴 작교선은 이렇다.
월하노인의 새끼줄로 엮어
백자도(百子圖) 병풍 아래서
꽃 같은 얼굴 옥 같은 가지 서로 엉킬 때,
서쪽 봉우리에는 석양빛, 쓸쓸히 머리 돌리네.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새 사람은 옛 아내와 닮았노라고.
繩聯月老, 帳垂百子, 花面玉枝交透. 西峰殘照 回頭, 暗算計, 新人似舊.
군보가 신부와 즐거운 날을 보내겠지마는 한편으로는 전처를 떠올릴 것이라고 했다. 군보가 과연 그랬을까? 우리의 관습상 재혼 축하시에서 죽은 아내를 거론하는 것이 좀 거슬릴 수 있다. 다산이 배출한 뛰어난 제자의 시를 나는 여기서 처음 보았다. 다른 시도 새 사람과의 즐거움과 그 뒤에 도사린 전처에 대한 쓸쓸한 느낌을 표현하였다.
다산은 이런 제자들의 축하시를 받고서 직접 발문을 썼다. 다산은 단박에 눈치를 챘다. "시에는 풍자하는 말이 많다. 풍자한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빨리 재혼했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이청의 시를 다산은 풍자가 담겨 있다고 해석했다. 아내를 잃은 지 반년도 지나지 않고, 해도 바뀌지 않은 겨울에 서둘러 재혼했다는 것이다.
다산은 시가 풍자를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제자들의 사곡에서 풍자를 읽고서 산중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이 풍자의 시법을 터득했다고 대견해 하며 칭찬했다. 군보에게는 이러한 뜻을 잘 받아서 여유롭게 생각하라고 당부했다. 다산이 굳이 풍자로 읽은 것은 다른 의도가 있을까? 다산은 이 해 11월 6일 꿈에 미녀를 만나 유혹을 받은 경험을 시로 쓰기도 했다. 인간적이고 솔직한 면을 그 시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시첩에서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색다르다.
이 시첩은 다산의 격조높은 글씨가 일품이다. 제자들의 시도 글씨의 수준이 높다. 혹시 다산이 표지에서부터 본문, 발문까지 깨끗하게 써서 군보에게 선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산은 이렇게 첩을 만들어 작품을 보관하거나 선물한 일이 적지 않다. 강진에서 다산이 지역민과 제자, 아들 등과 글을 주고받고 생활한 한 장면을 이 시첩에서 생생하게 찾아볼 수 있다.
(안대회·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