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언론인<br><a href=http://search.chosun.com/man/search_man.asp?keyword=류근일 target=new>☞인물 프로필 검색<

독립운동가 조소앙은 해방 바로 직전에 이런 문건을 발표한 적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우유 한 병 마실 수 있게 하오리다. 모든 청년들이 대학 갈 수 있게 하오리다." 지금은 별것도 아닌(?) 우유와 대학이 그때로선 아마 한(恨)의 상징이었던 모양이다.

그 사무친 '대학 한풀이'가 중국 문화혁명 때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북경대·청화대 같은 명문대학에서 교수와 학생들을 아예 지방으로 하방(下放)시키고, 그 대신 노동자·농민·병사들을 진주시켰다. 대학은 '잘난 ×'만 다니라는 법이라도 있느냐는 것이었다. 인텔리와 엘리트에 대한 적개심은 평등주의(egalitarianism) 혁명가들의 일반적인 속성이라고는 하지만, 이쯤 되면 그것은 가히 정신병 수준이라 할 만했다. 그 결과 오늘의 중국에는 중간 허리 세대가 거의 전멸 상태다.

이런 전례에 비추어, 1960년대도 아닌 2000년대 글로벌 경쟁시대에 한국의 신판 '문혁 세대'가 대체 왜 명문 대학들을 그처럼 적대시하는지, 그 명분과 심기(心氣)와 의도를 모를 까닭은 없다. 명분인 즉 "일류 병(病)을 없앤다"일 것이고, 심기인 즉 "비(非) 민중적 명문대 잘난 꼴 못 보겠다"일 것이며, 의도인 즉 '기성 인텔리·엘리트 타도'일 것이다.

하기야 이런 명분, 심기, 의도에는 그만한 이유가 전적으로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철밥통 대학'을 혁신적으로 고쳐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도 어느 정도의 일리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면에 '대구 지하철 방화범'처럼 도사리고 있는 비꼬인 증오심의 병리(病理) 현상이다. 그리고 대학 학사 운영을 국가의 폭력으로 좌지우지하려는 억압적 발상이다. 그리고 더 문제인 것은 그것을 통해 사회를 뒤집어 엎으려는 정치적 '히든 카드(숨겨진 카드)'다.

우선 명문대와 명문대 출신들을 적대시하는 심기는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는 가져선 안 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소아병적 자세다. 학부 2학년 운동권 새내기도 아니고, 어떻게 한 나라의 지도자란 사람이 "좋은 학교 나와서 출세한 사람이 순진한 사람에게…" 운운하며, 명문대 나온 것이 무슨 죄(罪)라도 된다는 양 시비할 수 있다는 것인가.

또 대학의 자율적인 입시(入試) 방침을 교육부가 사전에 억누르지 않았다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질책'했다는 소리 자체가 "지금이 무슨 유신시대냐" 하는 개탄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사회 각 부문의 운영을 권위주의, 사회주의처럼 국가권력의 불도저로 밀어붙이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교육 개혁 등 21세기 선진화 작업은 대학을 비롯한 시민사회 각 주체들이 자율적으로, 시장 원리에 따라 선택과 집중의 원칙하에서 추진할 과제다.

명문대학들에 재를 뿌리고 대학마저 하향 평준화해서 그것으로 기존 엘리트층을 숙청해 버리겠다는 '히든 카드' 역시 수도(首都) 이전과 상통하는 정략적 기획이다. 이렇게 해서 지금 우리 사회에선 사실상의 '영구혁명' '문화혁명' '민중주의 변혁'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정권의 '문화혁명집단' 자체가 그런 변혁의 의도를 공공연하게 '포고'하고 있기도 하다. 이른바 '전면전(全面戰)' 운운한 그들의 언동이 그것이다.

그렇다. 그들 말대로 지금 이곳은 한반도의 운명을 결판짓는 전면전의 순간이요 현장이다. 저들의 명문대 '조지기'와 '손보기' 선언은 기실 행정부·국회·사법부 점령에 이어, 대한민국 시민사회 각 부문을 접수하기 위한 전면전의 한 고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대와 노무현 정권의 충돌은 그 양자만의 국지전(局地戰)이라고 할 수 없다. 한반도 결승전의 한 양상인 것이다.

1980년대에 종속이론, 수정주의 사관, 관료적 권위주의론 등 지금은 이미 세계 학계의 고문서가 돼버린 이론들을 유행처럼 소개하던 교수들, 그들이 마침내 그들이 가르친 문혁성 제자들에게 몰리고 있는 셈이다. 이제 자기들이 배출한 '사이비 얼치기 진보'에 충분히 식상했다면, 교수들은 당연히 대학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전면전에 과감히 나서야 할 것이다.

(류근일·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