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중국은 휴일이었다. 중국공산당 창당기념일이기 때문이었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상하이(上海)에서 창당됐다. 창당대회가 열린 것은 7월 1일이 아니라 7월 23일이었다. 1938년 옌안(延安)으로 쫓겨가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이 "창당대회를 한 날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7월에 한 것은 분명하니 7월 1일을 창당기념일로 하자"고 해서 이날이 창당기념일이 됐다. 중국공산당 당사(黨史)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난 2001년에 후난(湖南)인민출판사가 펴낸 '중국공산당 80년 중대회의 실록'은 창당대회가 열린 날을 이렇게 묘사해 놓았다.
"1921년 7월 23일 밤, 야색(夜色)이 뒤덮인 중국 최대의 도시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의 한 조그만 건물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이날은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극히 평범한 밤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는 바뀌고 있었다. 중국의 운명을 바꿔놓은 위대한 정당이 이날 탄생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초대 당서기가 된 천두수(陳獨秀)를 대신해서 참석한 바오후이성(包惠僧)이었다. 대회에 불참한 사람이 당서기가 된 것만 봐도 창당 당시 중국공산당의 형편을 알 수 있다. 중국 천지에 당원이라고는 50명밖에 없었고, 이들을 대표해서 참석했다는 대표위원이라고 해야 마오쩌둥을 비롯한 13명에 불과했다. 회의도, 시작한 지 30분 만에 웬 알 수 없는 사람이 회의장에 들어선 뒤 "집을 잘못 찾아왔다"며 황급히 나가는 바람에 끝났다. 회의를 나흘간 했지만 마지막날 회의는 저장(浙江)성 자싱(嘉興)현의 난후(南湖)라는 호수 위에 떠있는 유람선에서 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중국공산당은 중국 역사를 바꿔놓았다. 창당 28년 만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했고, 작년 12월 말 현재 696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당원 수를 자랑하고 있다. 작년에만 당원 수가 137만명 늘었다고 하니 지금쯤은 7000만명이 넘었을 것이다.
그런 중국공산당을 미국은 곱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다. 특히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는 전쟁을 잘 일으키지 않는다는 '민주 평화론'을 신봉하고, 민주주의를 확산시켜야 한다는 신념에 가득차 있는 미국 지도층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물론, 현재의 중국공산당은 84년 전의 중국공산당과는 다르다. 이미 계급투쟁 노선을 버렸으며, 프롤레타리아뿐만이 아니라 '전 인민을 대표하는 정당'임을 선포, 기업인과 부자들도 당원으로 받아들이는 유연한 정당이 됐다. 당 강령에는 "사회의 생산력과 종합국력의 증강, 인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자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실생활에서도 요즘 같은 홍수의 계절에는 지방 당 간부들이 앞장서 재난구조 작업을 벌이다 순직하기도 하고, 이달 중순 서울에 오는 저장성 당서기처럼 외국투자 유치단을 이끌고 외국에 나가 상담을 벌이기도 한다.
중국은 현재 시장경제와 경쟁력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우(右)의 세상이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교리에 집착하는 좌(左)는 버려야 할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라는 강령을 가진 민주노동당이 집권 열린우리당과 선명성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때로는 정치적 야합도 서슴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좌(左)들에게 창당 당시의 낡은 중국공산당 강령이 아니라 새로워진 요즘의 중국공산당 강령을 한 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