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팔머 유럽정책센터 선임연구원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들은 수주 동안 고뇌에 찬 논쟁을 거친 뒤 유럽헌법을 부결시켰다. 이로써 유럽헌법은 죽지는 않았지만 사망 직전에 이르렀다. 유럽연합(EU)이 수년 만에 가장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오는 16~17일 브뤼셀에서 EU 정상회의가 열린다.

EU 회원국 정상회의인 유럽이사회는 유럽헌법 비준 절차 강행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회의는 사실상 유럽헌법 비준 절차를 중단시키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11개국이 국민투표나 의회에서 유럽헌법 비준 여부를 표결했고,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부결됐지만 아직 10여개 국가들의 비준 절차가 남아있다.

EU는 25개 회원국 모두에서 유럽헌법 비준 절차가 완전히 끝나야 유럽헌법 처리를 최종 결정할 수 있다. 유럽헌법 폐기 여부도 그때 가서야 결정할 수 있다. 그동안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유럽헌법 비준이 거부됐다고 해서 EU 자체나 유로(EU 단일통화)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EU 회원국들이 주권을 공유하는 바탕 위에서 보다 긴밀히 협력하고 함께 결정한다는 데 동의한 것은 각 회원국이 개별적으로 대응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도전들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 미국의 유일초강대국 부상, 지구 온난화, 국제 테러 등이 그런 도전들이다. 이런 것들은 각국이 서로 협력해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만들고 있다.

EU는 각국의 주권 공유와 민주주의, 법치에 기반한 글로벌 지역공동체의 가장 발전된 형태다. 한번 바뀌면 온 지구촌이 함께 바뀌는 세계경제 및 국제정치 구조가 동남아·동아시아·남아시아·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 등 전 세계 각 지역 국가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다.

유럽헌법 좌절은 경제개혁과 현대화, 장래 현안 해결에 대한 EU 회원국들의 논쟁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더 빠른 경제성장과 더 많은 고용으로 나아가는 훌륭한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첨예한 의견대립들이 있을 것이다.

새 유럽헌법 협상이 늦어지면 새로운 EU 외무장관이나 유럽 외교업무의 탄생도 늦어진다. 이렇게 되면 진정한 유럽 공동의 외교·안보·국방 정책을 만들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EU가 나서서 세계를 법치와 민주주의, 인권에 기반한 글로벌 체제로 이끌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번 투표 결과는 유럽인들이 국제문제들에 대해 중요한 역할을 하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EU 사이가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고 있다. 하지만 국가지도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각성은 EU 자체에 대한 것보다 더 중요하다. 유럽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는 유권자들에게 대중의 환영을 못 받는 자신들 정부를 심판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EU는 그동안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들에게 희생양이 되어왔다. 그 정치인들은 필요는 하지만 국내의 인기 없는 정책을 결정할 때는 늘 EU 탓을 했다.

현대 유럽 민주주의에서 대중은 의견을 요청받을 뿐 아니라 스스로 선택권을 행사해 EU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특히 유럽 정치단체들은 스스로를 비중있는 초국가적 정당으로 신속히 전환시켜야 한다. 4년 뒤 유럽의회 선거 때 유럽 정당들은 유권자들이 자신들과 경쟁그룹 가운데서 유럽집행위 위원장을 선출할 수 있도록 명확한 대안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한다. 오직 이 방법만이 대중에게 유럽통합을 자신들이 이끌고 있다는 느낌을 되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존 팔머·유럽정책센터 선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