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백악관에서 '고위 관계자'가 브리핑을 한다기에 갔더니, 고위 관계자란 다름 아닌 딕 체니 부통령이었다. 똑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뉴스 가치가 다른 법. 체니 부통령이 한 말이라고 쓰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근질했지만, 워싱턴 바닥에서 기자로 먹고살려면 '익명의 백악관 고위 관계자'라고 쓰겠다고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

그날 친구에게 "체니를 만났다"고 했더니, 그는 "미국 대통령을 만났구나"라고 했다. "아니, 체니 부통령이라니까"라고 정정하자, 그는 "체니가 실질적인 대통령 아니었어?"라며 피식 웃었다. 하긴 그것이 체니의 이미지다. '막후 실력자' '배후 조종자'….

요즘 체니 부통령이 상원 인준의 벽에 부닥쳐 고전 중인 존 볼턴 유엔대사 지명자 살리기에 나섰다. 볼턴이 '체니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체니는 "상원의원 중에도 자격 미달인 사람이 많다"면서, 유엔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하고 부하직원을 고압적으로 대했다는 등 온갖 비난에 직면한 볼턴을 감싸고 있다.

체니는 워싱턴에서 잔뼈가 굵은, 그래서 칡넝쿨처럼 얽히고설킨 탄탄한 자기인맥을 가진 진정한 의미의 워싱턴 정치인이다. 체니는 박사과정 학생 때 워싱턴에 와서 당시 하원의원이던 도널드 럼즈펠드의 보좌관으로 일하려고 면접을 봤다가 떨어졌다. 얼마 후 마음이 변한 럼즈펠드는 체니를 특별보좌관으로 채용했고, 체니는 의회와 행정부에서 '체니에게 맡기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평을 듣는 뛰어난 정치살림꾼으로 성장했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시절 '젊은 럼즈펠드'가 너무 설쳐서 잠시 유럽으로 쫓겨나다시피 했다가 귀국할 때 공항으로 마중나간 사람도 체니였고, 럼즈펠드를 부시 행정부 국방장관으로 추천한 사람도 체니였다.

워싱턴 정가에서 체니는 나서지 않고 집안살림하듯 조용히 일하면서도 자기 사람을 철저히 챙기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체니는 "파티나 좋아하고 퇴근시간을 지키는 사람들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하는 지독한 일벌레다.

사실 부시 행정부 핵심인사들은 하나같이 체니처럼 '재미없는 사람들'이다. 부시 대통령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린이' 타입이라, 지난 대선 때 워싱턴 사람들은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가 당선되면 워싱턴의 밤생활이 좀 재미있어지지 않을까?"라고 헛된 기대를 했었다.

볼턴 지명자도 전형적인 재미없는 사람이다. 볼턴과 함께 일해본 사람들은 "일 외에는 세상만사에 관심 없는 지루한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런데도 부시 대통령은 '추진력이 뛰어나다'며 그렇게 신임한다니, 볼턴은 과연 '부시맨'이자 '체니맨'이다. 게다가 볼턴은 지난 2000년 대선 재개표 논란 때 부시 당선을 위한 법정투쟁에 헌신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강경 외교정책의 대변자로서 외국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볼턴을 유엔대사로 지명할 때 백악관은 이만한 저항이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닐 것이다.

존 네그로폰테가 국가정보국장으로 발탁된 것은 사지(死地)인 이라크로 달려가 대사를 지낸 데 대한 상(賞)이고, 국내외에서 인기 최고였던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이 2기에서 탈락한 것은 '대통령을 위해 망가지는(?) 역할'을 감수하지 않고 자신의 명예를 추구한 데 대한 벌(罰)이었다. 결국 부시 2기의 인사는 '충성과 헌신의 대가'이며 '끈끈한 인간관계의 산물'이다.

(워싱턴=강인선특파원 insu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