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처럼 활짝 핀 목련 꽃을 보면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란 영랑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4·19가 되면, 찬란한 슬픔의 봄도 채 맞지 못하고 꽃잎처럼 떨어져간 젊은 영혼들이 생각나 꽃을 보는 마음조차 슬퍼진다. 한 송이 꽃을 피우려고 온 힘을 쓴 나무들이 자유의 꽃을 피우기 위해 몸 바친 젊은이들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럴 때 우리가 함부로 버려선 안 될 것은 우리가 경험했던 괴로움과 우리가 남에게 주었던 고통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 모두는 자신을 지키는 자유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언제나 폭력의 첫 피해자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에서 중요한 것은 찬란한 삶이 아니라 중심 있는 삶일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영혼도 나처럼 상처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날이나 이제는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삶이라고 생각되는 날 중국 시인 아이칭(艾靑)의 '외침'을 읽어보자.
'밤새 소리에/ 태양은 횃불 눈을 뜨고/ 밤새 소리에/ 바람은 부드러운 팔을 뻗어/ 밤새 소리에 도시는 깨어난다…/ 이것은 봄/ 이것은 봄의 아침/ 나는 어두운 곳에서/ 그 하얗게 밝은 우주를 슬프게 바라본다/ 그곳에/ 생명은 돌고 있고/ 그곳에 시간은 치달리는 바퀴처럼/ 그곳에 빛은 훨훨 날아…/ 나는 어두운 곳에서/ 하얗게 밝은/ 파도처럼 도약하는 우주를/ 구슬프게 바라본다/ 그것은 생활의 절규하는 바다.'
'그것은 생활의 절규하는 바다'라는 이 한 구절로도 그가 얼마나 옥중생활의 억울함을 외치고 싶었던가를 짐작하게 된다. 그의 외침은 그의 다른 시 '전속력으로 물결을 가르며 전진하는 밤'을 떠오르게 한다.
'자유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라'던 아이칭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며 화가이며 미술평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의 정치와 사상 그리고 문학의 산 증인이다.
아이칭은 중국어를 미술적이며 음악적으로 예술화한 언어의 개척자였다. 그래선지 아이칭의 연구가인 조우홍싱은 아이칭을 두고 '문학뿐 아니라 정직한 사람, 반드시 참된 말만 한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아이칭은 그림 공부를 하러 간 파리에서 22세 때 그림을 그리는 대신 첫 시 '모임'(會合)을 썼다고 한다. 그는 중국의 어느 시인보다 기복과 고난이 큰 시인이다. 1932년 5월에 중국 좌익예술가연맹에 가입한 죄명으로 6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는 일생을 옥살이와 숙청으로 온갖 고난을 겪었지만 그 고난만큼 훗날 중국인의 정신에 불을 지핀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감옥 속에서 쓴 옥중시 25편은 그의 대표작이며 출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의 소리는 곧 자유의 소리며 시의 미소는 곧 자유의 미소’라는 그의 말은 중국시 정신을 대변하는 말로도 유명하다. 아이칭은 주은래(周恩來·저우언라이)와 루쉰을 존경했는데 ‘아큐정전(阿Q正傳)’을 쓴 루쉰을 가장 존경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루쉰의 애민정신에 깊은 영향을 받아 미술에서 문학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전해진다.
의학에서 문학으로 진로를 바꾼 루쉰과 미술에서 문학으로 진로를 바꾼 자신을 중국인의 정신개조를 위한 혁명가와 시인으로 생각할 만큼 루쉰을 흠모한 아이칭은 루쉰의 서거 4주년을 기념한 ‘파종하는 사람’을 쓰기도 했다.
그를 더 기억하는 것은 그가 ‘두보의 시’, ‘소동파의 적벽부’, ‘도연명의 귀거래사’, ‘루쉰의 아큐정전’ 등과 함께 오늘의 중국 문화를 주도해 온 대표적인 인물들의 반열에 올라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고통의 집을 보지 못한 사람은 우주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 사람’이라는 에머슨의 말이 오늘은 아이칭의 말인 듯 뼈아프게 다가온다.
(천양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