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 직원들이 길을 가다가 외제 승용차가 눈에 뜨이면, 이유 없이 수첩을 꺼내 번호판을 적고 차 주인의 납세 실적을 뒤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뿐이랴. 외제차는 언제나 불특정인들이 가하는 '파손행위(vandalism)'의 집중 대상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한국을 국민소득 수준에 비해 외제차가 가장 팔리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고, 통상마찰을 일으키는 단골 메뉴가 되기도 했다. 언론도 국수주의적인 면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소비재 수입이 늘면, 해당 기업과 소비자들에게 "애국심을 가지라"고 꾸짖었다. 수출은 끝없이 늘리자고 하면서도, 수입은 죄악시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때, 만약 영국의 권위지인 파이낸셜 타임스(FT)가 한국인들을 향해 엊그제 썼던 대로 "정신분열증세를 보인다"든가 "한국인들은 한쪽 발로는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다른 발로는 브레이크를 밟고 있다"고 혹평했어도 우리는 할 말이 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한국이 경제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고 외환위기를 외국 자본의 도움으로 넘기면서 공무원들이나 일반국민들도 꽤나 개방적이 되었다고 자부해왔는데, 외국인들의 눈에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한국인들이 반짝 오픈 마인드를 가졌다가 이제 다시 폐쇄적인 옛날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FT가 한국 정부를 연속 공격한 것은 그런 외국 투자가들의 심정을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FT가 '한국 때리기(Korea bashing)'의 논거로 삼았던 몇 가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특정 주식을 5% 이상 취득할 때 단순보유인지 아니면 경영참여가 목적인지 명확하게 하고, 주식 취득 자금의 주인도 밝히라는 규정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춰볼 때 전혀 시빗거리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외국인 이사 수를 절반 이하로 제한하려는 일부 국회의원들의 입법 움직임은 정부가 명확히 반대하고 있다. 외국인 이사 수 제한은 다른 나라에서는 하는데 오히려 우리나라에선 하지 않고 있으니 FT 보도는 더더욱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크게 봐서 외국인들의 불평은 이유가 있다. 한국인들의 경제민족주의가 멀리 사라지는 듯하다가 다시 유턴해 오는 분위기를 그들은 분명 느끼고 있을 것이다. 뉴브리지 캐피탈이라는 사모(私募)펀드가 제일은행 보유 주식을 팔아 1조원이 넘는 차익을 남기자 국내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외국 투기자본가들이 우리의 부(富)를 다 쓸어간다" "토종 대형 사모펀드를 빨리 키워야 한다" "이제부터 공적자금 기업은 국내자본에만 팔아야 한다"는 등의 민족주의적 외침이 요란하다. 심지어는 주식배당을 제한해 외국인들이 지나치게 많이 가져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온다. 은행 주식가치를 그만큼 올려놓은 뉴브리지의 공로가 있건만, 그 점을 인정해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제일은행 주식의 50%를 갖고 있는 정부도 그 덕분에 공적자금을 많이 회수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외국 투자가들! 당신들은 돈이나 많이 갖고 들어와라. 그러나 이 땅에서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는 안 되고, 경영에 개입해서도 안 된다." 한국 정부 관리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이런 의식이 배어 있다고 외국 투자가들은 생각하고 있다. 지금의 분위기로 보아 외국인들은 조만간 기업 인수 시장에서 정서적으로 배척당하고 경영 참여도 힘들어질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황금 시장에서 장사를 못하게 되는 셈이다.
바로 이 같은 불안심리에서 "한국을 동북아 금융허브로 만들겠다는 한국 정부의 야망은 웃기는 일이며 위선적이기까지 하다"는 험한 말이 나온 게 아닐까. 금융허브의 꿈이 제도가 아닌 국민 정서로 인해 흔들리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변용식 ·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