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분장한 나카무라 간지로씨(오른쪽)가 사랑극 가부키‘소네자키신주(曾根崎心中)’에서 열연하고 있다. 나카무라씨는 올해 74세다. 일본문화공보원 제공


'2005 한·일 우정의 해'라는 말은 이미 무색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예정돼 있던 기념 행사들은 속속 취소되고 있다. 당초의 계획은 한국과 일본에서 올 한 해 거의 매일 기념 공연과 이벤트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일본 전통극인 '가부키(歌舞伎)' 공연만 해도 당초 서울, 부산, 광주 등 3개 도시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말에 광주 공연은 돌연 취소됐다. 2일로 예정돼 있던 '일본의 전통공연 가부키' 심포지엄도 무산된 상태다.

그런 가운데, 지난 1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기념으로 국내에 처음 무대가 펼쳐진 이후 17년 만에 가부키 공연이 무대에 올랐다. 말 그대로 '격랑(激浪)' 속에 공연이 이뤄졌다. 이번 가부키 공연은 당초 한·일(韓日) 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연 타이틀은 '소네자키신주(曾根崎心中)'라는 유명한 사랑 이야기. 에도 시대의 실화를 토대로 한 것으로, 사랑하는 남녀가 주위 반대와 오해 때문에 함께 자살한다는 비극이다. 일본판 '로미오와 줄리엣'인 셈이다.

주한 일본대사관은 이번 공연을 두고 신경을 많이 썼다. 일본의 대표적인 가부키 극단인 '지카마쓰자(近松座)'와 명배우 나카무라 간지로(中村?治郞·74)씨를 험악한 분위기에서 서울로 초청했기 때문이다. 특히 나카무라씨는 52년 동안 '소네자키신주' 여주인공 역할을 1200회나 맡은 베테랑 배우로, 일본에선 인간 국보(國寶)로 지정돼 있다. 일본에선 가부키에 별 관심이 없어도 '나카무라 간지로'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지난달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다카노 도시유키(高野紀元) 주한 일본대사의 발언이 불을 붙인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대사관측은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해온 행사가 '나홀로 잔치'로 끝나지 않을까 전전긍긍 했다.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나카에 아라타(中江新)씨는 "그런데 한국측 VIP 인사들이 예상보다 많이 공연장을 찾아주었다"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날 공연장에는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 김용운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 김명곤 국립극장장, 프랑수아 데스쿠에트 주한 프랑스대사, 김태지 전 주일대사 등 주요 내외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일반 관람객들의 참석률도 기대 이상이었다. 전체 객석 1500여석 중 80% 정도가 찼다. 특히 20~30대 젊은 관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한국외대 김초연(컴퓨터공학과2)씨는 "서울에서 가부키를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며 "독도 문제 때문에 문화까지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시간40분에 걸친 공연이 끝난 밤 10시30분, 극장 2층에서 작은 환영회가 열렸다. 나카무라씨는 "한·일 우정의 해에 가부키 공연을 하는 기회를 갖게 돼 무척 기쁘다"며 "문화 교류를 통해 한·일 관계가 좀 가까워졌으면 좋겠다"고 한국 데뷔 소감을 밝혔다. 김현자 국립무용단 단장은 "영토 문제로 실타래처럼 엉클어진 한·일 갈등을 풀 수 있는 실마리는 문화와 예술 교류일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일본의 가부키 명배우 나카무라 간지로(왼쪽 두번째)씨가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 한국측 내빈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1일 저녁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가부키 공연을 마친 뒤였다. 다카노 일본대사(오른쪽 끝)가 박수를 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