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었다, 있었다, 있었다…. 정도상은 지치지 않고 말한다. 있었다라고.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있었다라니. 정도상의 소설은 엊그제 일들을 참, 포그니도 껴안는다. 지난 계절의 눈이 쌓여 있었다, 얼어붙은 발자국의 길이 있었다, 무덤도 눈에 파묻혀 있었다, 숲속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132쪽)
소설을 읽는 맛, 그런 맛이 있다면, 정도상의 소설은 혀가 아니라 식도 아래쯤에서부터 맛을 알려온다. 있었다, 있었다, 있었다, 라고 되뇌며 붙들려 있으면 식도가 기별을 해온다. 소설의 맛이란 그런 것이라고.
어떤 작가의 작품인들 허무주의의 붓끝이 조금쯤은 닿아 있지 않을까마는 정도상은 사회개혁을 향한 운동을 하면서도 두 손에 담긴 허무를 내려놓지 않는다. 서로서로 가엽다. 지지않는 꽃이란 없다(133쪽), 라는 인식과, 나는 혼자였다(134쪽), 라는 인식은 소설을 위해 조성된 문장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몸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것이라고 해야 옳다.
이 책에는 여섯 개의 작품이 실렸다. 작가의 말을 보니 2000년에 발표한 '개 잡는 여자'가 최근작이라고 돼 있다. 자기 책을 무명작가의 절판된 작품집이라고 불렀다. 스스로 무명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오만하다. 덕분에 우리들의 리뷰는 오만을 찾아서, 가 된다.
'개 잡는 여자', '오늘도 무사히', '그토록 긴 세월을', '달빛의 끝', '부용산', '구름의 서쪽' 같은 작품을 읽어가면, 그것이 시대정신을 읽어내려는 작품들이라는 일방적인 선입견으로부터 작가가 어떻게 도망치려 했는지가 드러난다. 그렇고 그러했던 것들을 마치 아닌 것처럼 말하려고 하는 안쓰러움이 있다.
'개 잡는 여자'는 성남 모란시장에서 개 잡는 일을 하는 미자가 주인공이다. 이혼을 요구하는 그녀의 남편, 북에 두고 온 첫 부인의 젊었을 때의 사진만 바라보는 아버지가 등장인물이다. '오늘도 무사히'는 시내버스 운전사가 주인공이 아니다. 대기업 홍보이사 영철, 그리고 그의 비리 사건을 수사하는 검사가 등장인물이다.
'그토록 긴 세월'은 죽었다가 깨어나는 일을 반복하는 어머니의 아들이 주인공이다. '달빛의 끝'은 보험설계사 윤애, 벌이가 시원치 않은 남편, 그러다 고향을 찾은 윤애가 우연히 만난 탈주범이 등장인물이다. '부용산'은 간첩 혐의로 감옥에 갇힌 장기수와 그의 어머니가 등장인물이다. '구름의 서쪽'은 안마시술소에서 일하는 안마사이자 시각장애인인 민이 주인공이다.
한 가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다. 정도상이 북쪽과 남쪽의 관계 맺음에 대해 초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이 눈치채는 과정이다.
소설가의 작품 때문에 세상이 고발당하고, 세상이 변하게 되고, 세상이 조금쯤 나아질 것이란 관념적 습속에서 정도상은 벗어나 있다. 쓴다는 것이 곧,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는, 초기 사르트르적인 관념이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1960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고, 전북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고 대뜸 책날개에 써 있다. 그는 이 문장을 얼마나 심드렁하게 가다듬었을까. 아니면 무슨 깊은 의미가 있을까. 1987년 광주항쟁소설집 '일어서는 땅'에 단편소설 '십오방 이야기'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