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있다면 이런 풍경일 것이다. 악마는 하나도 없지만 천사들이 날개를 잃고 상처를 입어 하나씩 사라지는,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아무도 모른다'의 슬픔은 그런 것이다. 유기된 아이들의 6개월간의 처절한 삶(실화다)을 그린 영화에서 악역은 하나도 없다. 아빠가 각기 다른 4명의 아이들에게 쪽지 하나 남기고 사라졌다가 불쑥 나타나기를 거듭하는 엄마마저도, 악의는 없었다. 엄마는 아이들을 책임지기엔 자신의 삶을 너무 사랑했고 낭만적이었다. 아이들만 살고 있어 거의 폐허가 된 집에 집세를 독촉하려고 들렀던 주인 여자도 냉정했던 건 아니다. 그녀는 그저 상황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악의가 없는 악행의 대가를 온통 아이들이 치른다는 측면에서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슬픈 영화가 아니라, 매우 잔인한 영화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잔인한 감정보다 따스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은 아이들, 그들 스스로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서로를 치유하는 아이들 때문이다.

일본 도쿄의 작은 아파트. 엄마(유)가 아들 아키라(야기라 유야) 하나를 데리고 이사를 온다. 이어 커다란 가방에서 아이 둘이 나온다. 셋째 아들과 넷째 딸이다. 그리고 저녁 무렵엔 둘째 아이가 들어온다. 아이가 많아서 쫓겨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이렇게 잠입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걸 알게 됐다.

아이들은 늘 아무도 모르게 사는 게 익숙하다. 호적도 없고 학교도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지만, 그들만의 규칙에는 익숙하다. 베란다에는 절대 나가 놀지 말 것, 방에서 큰소리 내지 말 것 같은 작은 규칙을 배우고, 남매끼리 사랑한다. 무책임한 낭만주의자인 엄마는 아주 멀리 가버린 듯 연락이 없고, 엄마가 두고 간 돈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키라는 가스·전기·수도가 차례차례 끊기자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이제 엄마의 규칙 대신 아키라의 규칙이 생겼다. 아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바깥 공기를 쐬고, 아스팔트에 돋아난 잎새를 보고, 공원의 수돗물로 목을 축인다.

아이들의 치유 능력은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축복이다.

어느새 아키라는 불량한 아이들을 만나 잔도둑질까지 배우지만, 소년에게 이건 세상을 만나는 한 가지 통로였다.

최연소 칸 수상자인 야기라 유야의 연기는 물론 아이들 모두의 연기는 실제 생활에 그저 작은 카메라 하나만 얹어놓은 듯,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다. 영화 속 6개월의 시간만큼 실제로 촬영을 한 진지한 접근법의 결과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세상 일을 윤색하거나 탈색하지 않은 채 날것으로 보여주는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 전작 '원더풀 라이프'에서도 감독은 슬픔을 말하는 자, 스스로 치유케 했다.

큰 슬픔만큼의 크기로 삶의 치유 능력을 보여준 감독은 잔인하고 슬프며, 감동적이고 낙관적인 동화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존재를) '아무도 모른다'는, (우리는 타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