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중견 국제정치학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는 "요즘 걱정이 돼서 밤에 잠이 안 온다"고 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밝은 그는 동북아의 긴장과 파고(波高)가 날로 높아지는 가운데 우리 정부의 대응이 너무나도 불안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날 오후 어떤 모임에서 만난 다른 중견 국제정치학자 역시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들뿐 아니라 미국에서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고 '워싱턴 컨센서스'에 정통한 대부분의 주류 국제정치학자들은 아마도 요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책임자들이 국제정치의 '상식'과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우려한다. 그래서 자칫하다가는 한국이 국제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서 '왕따'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들 '국제파'들이 보기에 외교부나 국제정치 전문가들을 제쳐놓고 청와대나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주도하는 외교안보 정책은 위험천만이다.
굳이 '국제파'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민족파'가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번번이 미국·일본 등 핵심 우방국들과의 민감한 외교적 사안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들은 북한 핵 문제 등을 다루는 데도 국제정치적 측면보다는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 등 민족적 관점을 우선시한다. '민족파'가 보기에 국제정세를 너무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주체성과 필요성을 고려하지 않는 소극적이고 패배적인 입장이다. 이들은 광복 후 50년 넘게 워싱턴의 시각에서 서울을 바라보던 데서 벗어나 서울의 시각에서 워싱턴을 보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국제파'는 '민족파' 때문에 한국이 큰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고 걱정하지만, 그동안 지나치게 민족적 관점이 소홀히 됐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세계가 자유·공산 진영으로 양분(兩分)되어 치열하게 대결하던 시절에는 힘들었지만, 냉전이 끝난 상황에서 민족적 관점을 좀더 내세우자는 주장이 전혀 터무니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민족파'의 목소리가 너무 커져서 일방적이 됐다는 점이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에서 국제정치적 고려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외적 조건이다. 그런데도 '국제파'를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인 것처럼 몰아붙이며 민족적 관점만을 강조하는 것은 '민족파'가 중시하는 민족적 이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민족파'와 '국제파'의 대립은 자주 나타났고, 번번이 두 관점 사이의 조화와 균형에 실패하는 바람에 낭패를 보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1894년 우리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도 '민족파'인 동학농민혁명군과 '국제파'인 갑오개혁 정부가 타협하지 못하고 정면 충돌하여 파국을 맞은 것이다. 100년도 더 지난 지금 다시 그런 어리석음을 반복해서야 되겠는가?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25일 서울에서 열린 한 국제학술회의에서 '국제파'가 분명한 한국의 중견 학자들이 미국 인사들에 대해 "미국도 한국의 역사와 문화,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상흔을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국제파'도 이제 민족적 관점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다음은 '민족파'가 국제적 관점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이고, 양자가 한자리에 모여 대화와 토론을 벌여야 할 차례다.
(이선민·문화부 차장대우 sm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