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매장에서 일하는 신지은 기자

'①주말근무 ②야간근무 ③가족동의 ④건강….' 2월 19일 오후 3시 서류 전형에서 합격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서울 강북 할인매장의 면접시험. 30대 남성 부점장이 화이트 보드에 이렇게 죽 적어 내려갔다. 입사를 위한 '전제 조건'들이다. "문 닫는 날은 설날과 추석, 딱 이틀밖에 없습니다. 보건휴가(생리휴가)는 무급(無給)입니다. 대부분 돈 벌려고 안 쉬고 그냥 나옵니다." "그럼, 휴일은 없어요?" 30대 여성이 묻자 "한 달에 일요일 숫자만큼 쉽니다. 한 달에 일요일이 네 번 있다면 이 중 1번은 주말에, 나머지 3번은 평일에 쉬는 게 원칙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주말이 없다는 얘기네" "가족 여행은 못 가는구나"…. 부점장이 "조건이 맞지 않는 분들은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집으로 가셔도 좋다"고 정중히 말하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오랜 시간 서있는 직업입니다. 체력이 좋아야 합니다. 남편한테 속이고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솔직히 말하세요. 결혼하신 분들, '애가 감기에 걸렸어요' '유치원에 가봐야 돼요' 하면서 결근하거나 조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조건을 유념해 주세요."

근무시간 내내 서 있으면 종아리는 모래주머니가 달린 듯 천근만근이다. 휴게실 의자에 다리를 올려놓고 잠시 쉬고 있는 할인매장 여성직원들. 서울 강북의 대형 할인매장에서. 이기원기자.

합격 통지를 받고 첫 근무를 시작한 2월 21일.

회사에서 나눠준 근로계약서에 30대 남성 교육관이 시키는 대로 '시급 3300원, 주당 근로시간 39시간, 주 6일 근무'라고 적어넣었다. 하지만 교육관은 "근무시간은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많이 일하면 많이 버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 일하고 싶은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라고 물었다.

대부분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하루 6시간을 일해도 2만원이 채 안 되고 한 달 근무일 26일 가량을 채워야 손에 쥐는 월급이 70만원 정도(오전조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틀 뒤인 23일 접수한 근무조 신청에서도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여성 직원의 의욕이 강하게 반영됐다. 직원들 절반 이상이 밤 11·12시에 끝나는 '야근조'를 신청했다. 자녀를 둔 주부들이 상당수였다. '가족이 집을 비운 낮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할 것'이라는 선입관과는 달랐다. 한 주부 사원이 의문을 풀어줬다.

"돈이 있어야 애들 학교도 보내지."

야근조는 밤 10시 이후 시급의 50%(1650원)에 해당하는 수당과 '택시비 보조' 명목으로 3000~1만원을 지급받는다. 물론 모두 버스와 지하철을 2~3번씩 갈아타고 집에 돌아가 택시비를 생활비에 보탰다.

4일 동안의 교육기간을 끝낸 26일 오후 3시 반.

계산대(포스)에 정식으로 투입되기 직전, 주부 사원들은 교육장에서 일명 '계산원 7대 용어'를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봉투 필요하십니까?(How are you sir? Do you need a plastic bag?)" …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Thank you. Have a nice day.)" '매장 근처에 외국인 대학생들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7대 용어를 영어로도 외우도록 했다. 여전히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더 크게! 자존심을 버리세요!"

'파트 타이머'인 선임 여성직원들이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목소리가 커졌다. 짝짝짝! 박수 12번을 치고 우리는 입사 6일 만에 실전(實戰)에 투입됐다. 기다리는 것은 까다로운 손님, 자존심을 접어야 하는 서러움, 무엇보다 부러질 듯 아픈 두 다리다.

크게 쉼호흡을 한 번 하고 계산대로 걸어 들어갔다. '손님과 맞짱뜨지 마라'는 매장 원칙을 되새겼다. "왜 빈 박스가 없어!" 중년 남자가 신경질을 버럭 냈다. "곧 갖다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웃기 위해 얼굴 근육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2시간이 넘어가자 팔힘이 떨어졌다. 종아리는 모래주머니가 달린 듯 천근만근. 목도 타올랐다.

주말이면 여성 직원들은 최장 10시간 동안 일했다. 출근 직후 라커룸에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일을 끝낸 뒤 매출금 반납, 오타(誤打) 사유서 작성 등 잡일을 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12시간 이상 매장에서 보낸 셈이다. 근무와 관련됐더라도 이런 잡일을 하는 시간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았다.

우리는 관례대로 서로를 "언니"라고 불렀다. 스무 살에서 마흔 살까지 연령대가 다양했지만 똑같은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부사원은 미혼 여성 사원과 마음가짐이 확실히 달랐다.

입사 후 2주일 동안 함께 입사한 14명(기자 제외) 중 5명이 중노동을 못 견디고 중도 하차했다. 매달 적금 25만원씩 꼬박꼬박 넣어 왔다는 22세 여직원은 "하루 10시간씩 이틀을 일했더니, 다리에 붉은 반점이 가득 났어요. 까다로운 손님들 때문에 스트레스로 터져버릴 것 같아요"라고 말하곤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 이렇게 그만둔 5명 중 4명이 미혼 여성, 자녀를 둔 주부사원은 1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