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 드라마나 화제 드라마의 필요충분 조건이 있다. 바로 ‘스타를 더욱 빛나게 하는 스타’, 이른바 ‘특급 조연 스타’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각 요일별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드라마를 봐도 이 공식은 입증된다. 주말극 수위를 다투는 SBS ‘토지’의 유해진과 도지원, ‘봄날’의 이휘향, 전체 드라마 1위인 KBS ‘해신’의 이희도, 월화 미니시리즈 최강자인 ‘쾌걸춘향’의 안석환 등이 감칠맛 나는 초특급 조연 연기로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고 시청률 고공행진을 견인하고 있다.
● SBS ‘토지’의 유해진과 도지원… 악녀·악한 커플 연기로 주목
‘토지’의 유해진은 최근 인기가 수직상승, 아예 최서희(김현주)에 필적할 만한 주연급 조연으로 발돋움하면서 조연 연기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연극무대에서 연기를 배워 ‘주유소 습격사건’ ‘나비’ ‘광복절 특사’ 등 영화에서 깡패나 건달, 엽기적인 경찰 등 튀는 캐릭터를 맡으며 연기력을 다져온 유해진은 ‘토지’에서 미워할 수 없는 못된 연기로 만년 조연의 설움을 던져버리고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유해진은 서희의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죽임을 당한 ‘김평산’과, 성인이 된 서희를 파멸시키기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 그의 망나니 첫째 아들 ‘김두수’의 1인2역을 맡고 있다. 인간이 얼마만큼 야비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리얼하게 연기, “살인을 저지르고 여자를 때리는 개차반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양반이라고 유세하는 인간말종 연기를 그보다 더 잘 보여줄 연기자가 있을까”라는 칭찬과 “매번 서희에게 당하는 모습이 코믹하게도 느껴져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는 코멘트가 줄을 잇는다.
‘토지’의 또 다른 악의 축 도지원은 조준구 부인 홍씨 역을 맡아 최참판댁 재산을 노리는 먼 친척으로 시종일관 나쁜 일을 꾸미는 악녀 연기로 유해진과 함께 최서희를 협공한다. ‘여인천하’의 경빈 역으로 ‘뭬야!’라는 유행어를 만든 도지원은 이후 몇 편의 작품을 거쳤지만 시청자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전작을 능가하는 홍씨 연기로 그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경빈 이미지를 떨쳐냈다.
SBS ‘여인천하’ 이전까지 선한 캐릭터만 도맡았던 도지원으로서는 이제 악녀 캐릭터가 몸에 딱 맞는 옷처럼 잘 어울린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이러다가 악역 이미지가 굳어질까봐 걱정되는 점도 있다고 할 정도다. 그렇지만 도지원은 “연기는 연기일 뿐이고 연기자로서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만큼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악한 모습을 다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촬영에 임하고 있다.
● 악녀 연기의 대모로 자리잡은 SBS ‘봄날’의 이휘향
‘여인천하’ ‘천국의 계단’을 통해 악녀 연기의 진수를 보여줬던 이휘향은 KBS ‘구미호외전’에 이어 최근 ‘봄날’에서 아들 은섭(조인성)을 통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나쁜 엄마 오혜린 연기로 중반까지 극의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드라마가 시작부터 계속 30% 안팎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데는 10년 만에 컴백한 고현정의 흡인력도 컸지만 술집 출신에 남편 몰래 바람을 피는 등 자신은 흠잡힐 행동을 밥먹듯 하면서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 정은(고현정)에게는 잔인하게 구는 이중적 모습을 리얼하게 연기한 이휘향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은섭이 오피스텔에서 쌀 씻는 정은을 몰래 뒤에서 껴안으며 사랑고백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후 고현정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폭행하는 장면은 이휘향 악녀 연기의 진수로 손꼽힌다.
사실 그녀의 악녀 연기는 내공이 깊다. ‘천국의 계단’에서 아들(신현준)을 희생시켜서라도 딸(김태희)을 이용해 정서(최지우)와 송주(권상우) 사이를 떼놓고 재벌가 사위를 두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엄마 연기를 표독스럽게 해내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악녀 연기자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공교롭게도 ‘여인천하’ ‘천국의 계단’ ‘봄날’ 등 악녀로 출연하는 드라마마다 대박이 터져 드라마 PD사이에서는 ‘악녀 섭외 0순위’로 거론되고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악녀 연기로 별 다섯 개가 따라붙어 다니면서 얼마전에는 미디어 다음(media.daum.net)에서 올 1월 21일부터 28일까지 5만344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 59.6%(3만1786명)의 압도적 지지로 ‘유리화’의 이응경, ‘토지’의 도지원을 제치고 영예의 1위 자리를 차지했다.
● 휴머니즘 코믹 연기의 지평 연 KBS ‘해신’ 이희도
올 상반기 드라마의 최강자 ‘해신’에는 쟁쟁한 감초 연기자가 셀 수 없이 많다. 박영규, 김갑수, 이원종, 이재용, 김흥수 등 쟁쟁한 배우들이 주연급인 최수종(장보고 역), 송일국(염장 역), 수애(정화 역), 채시라(자미부인 역)를 탄탄하게 떠받치며 저마다 특급 조연 연기를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러나 조연급 중에서 비중이 큰 것도 아닌데 유난히 눈에 띄는 연기자가 장보고의 어릴 적 친구 순종의 아버지 막봉으로 분하는 이희도. 장보고와 정년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몰래 도와주면서도 위험을 불사하고 돈벌이를 위해 자미부인의 상단으로 들어가는 사고뭉치 연기를 펼치면서 잔잔한 감동과 스릴을 연출하고 있다. 진지한 다른 조연급 배역에 비해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면서도 사람의 도리는 잃지 않는 막봉이라는 캐릭터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서민의 삶을 대변하는 역할이기에 더욱 시청자의 사랑을 받는 것 같다는 평.
‘제2의 임현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또한 숱한 인기 사극에서 감초 연기를 도맡아왔다. MBC ‘허준’에서 최판술 역으로 감초 연기자의 임무가 뭔지를 온몸으로 보여줬고, ‘상도’에서는 비단전주이자 극중 분위기 메이커였던 허삼보로 나와 역시 극의 흐름상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감초 연기를 맛깔나게 요리했다.
‘해신’과 함께 오는 3월 중순 새롭게 시작되는 MBC 새 주말극 ‘제5공화국’에서는 허문도 역을 맡아 누구보다 바쁜 봄날을 맞게 됐다.
● 2005년판 시아버지상에 도전하는 KBS ‘쾌걸춘향’의 안석환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게 마련. 연극 배우 출신으로 최근 몇 해 동안 ‘눈사람’ ‘좋은 사람’ ‘북경 내사랑’ 등 드라마에 출연해왔으나 대박 드라마가 없어 인지도는 낮은 편이었던 안석환은 판소리 ‘춘향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신세대 드라마 ‘쾌걸춘향’이 시청률 20%대 중반을 기록하면서 뒤늦게 스타덤을 실감한다.
극중 예비 며느리 춘향(한채영)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몽룡(재희)의 아버지 역을 맡아 단숨에 여고생 팬까지 따르는 인기 중년 연기자 반열로 도약했다. 춘향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모습, 춘향을 밤새 간호하고 깨어나자마자 “뭐 좀 먹으라”며 걱정하는 모습 등이 신세대 여성 사이에서 최고의 시아버지상이라는 격찬을 받고 있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 휴대폰을 통해 “아저씨, 너무 귀여워요” 등의 문자 메시지도 날아온다며 마흔 중반의 나이에 생긴 오빠 부대의 존재가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근엄하지만 속정 깊은 가장이 그가 맡은 재희 아버지의 기본 캐릭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장기 공연하면서 코믹 연기를 질릴 때까지 해본 프로답게 태극기를 든 채 아들을 잡으러 뛰어가는 장면 등 일부 코믹신은 직접 아이디어를 내 연출에 반영하는 열성을 발휘,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 제아무리 연기의 달인이라고 해도 극단적인 선과 극단적인 악을 다 가진 연기를 하기란 힘든 일임에도 불구, 안석환은 지난해 KBS ‘북경 내사랑’과 연극 ‘리처드 3세’를 통해 치떨리는 악역 연기도 완벽하게 마스터, 극과 극을 다 소화하는 몇 안되는 배우임을 확실히 입증했다.
● 조역 스타 흔들리면 시청률도 흔들려
내세울 만한 조연 스타가 없는 드라마가 최고의 시청률을 낼 수는 없다. 시청자가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극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주변 인물이 극의 진행상 반드시 필요한 장면을 완벽한 연기력으로 소화해내 리얼리티를 살려줘야 하는 게 필수불가결하다.
MBC ‘슬픈연가’가 권상우, 김희선, 연정훈 등 최고의 톱스타를 앞세운 데다 주인공들이 놀라운 눈물 연기를 보이고 있지만 시청률이 어느 선 이상을 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강남길이나 이미영, 김연주 등 조연이 만들어내는 장면이 때로는 불필요하다고 느껴질 만큼 흡인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탓도 있다.
반대로 대박 드라마는 예외없이 통상 1~2명, 사극은 다섯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많은 특급 조연 스타들을 배출해왔다. MBC ‘대장금’의 임현식과 금보라, SBS ‘파리의 연인’의 성동일, ‘천국의 계단’의 이휘향과 이완, ‘발리에서 생긴 일’의 신이, KBS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이혜영 등 지난 1년여 동안 성공한 드라마들이 낳은 특급 조연 스타들.
중견 탤런트 백윤식은 영화 ‘범죄의 재구성’ 이후 최고의 연기자 반열에 올라 지금은 나이와 관계없이 주연급 배우로 자리잡았고, 송일국은 KBS 주말연속극 ‘애정의 조건’에 조연으로 투입됐으나 시청자의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막판에는 주연으로 극의 흐름을 주도했고, 곧바로 차기작 ‘해신’에서 주연 자리를 꿰찼다.
한류 드라마 ‘겨울연가’ 또한 권해효, 정동환 등 숱한 주변 배우가 배용준과 최지우를 뒷받침하는 든든한 연기 지원을 해줬기에 지금의 한류 열풍이 가능했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스타 탄생이 힘든 일이듯 조연 스타 탄생도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많은 시청자의 인구에 회자되려면 일단 드라마 자체가 화제를 모아야 하고, 역할 자체가 주연급 부럽지 않은 매력과 카리스마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 바로 그 같은 의미에서 조연 스타의 탄생은 대박 드라마의 필요조건이기도 하고 충분조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