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중 사명대사가 금강산 표훈사에서 강론하고 있을 때 왜병이 밀어닥쳤다. 그 많던 중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대사만은 부처님 앉음새인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움직이지 않자 적병들은 빼들었던 칼을 꽂았고 합장 경례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 길로 대사는 1000여 승병을 거느린 승군사령관으로 출병을 한다. 여러번 맞싸웠던 적장 가토(加藤淸正)가 서생포에 진을 치고 대사와 담판하자는 전갈이 왔다. 몸에 작은 계도(戒刀)만을 지니고 적진에 드니 칼과 창을 든 군졸로 에워싼 살벌한 분위기였다. 가토가 대사에게 묻기를 “귀국에 제일 값진 보물이 뭐요” 하자, “아주 가까이 그 보물이 있다”고 하니 “뭐냐” 하고 물었다. “황금 천 근이 걸린 바로 당신의 머리요” 했다.
왜란의 끝무렵 대사가 사신으로 일본에 가게 됐을 때 항간에는 '조정에 삼원로(三元老)가 있다 말 마오 /사직과 백성의 안위가 오로지 한 스님에게 달렸는 걸' 하는 노래가 번졌고 이수광은 대사의 송별시로 '난세에 이름난 장수들 많건만 /기이한 공로는 늙은 스님 한 분일뿐이네' 했다.
이렇게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德川家康)와 회담, 피랍 한국인 3000명을 데리고 돌아왔고 그 체일 동안 사귀었던 권력있는 스님들을 통해 편지외교로 다시 1800명을 송환, 가족에게 안겨준 한국사 굴지의 외교관이기도 하다. 이처럼 일본에 맺힌 한과 응어리를 풀어준 탓인지 그후 항일정신이 긴요해진 역사시기마다 어떤 형태로든지 민심을 결집시켜온 사명대사다.
왜란후 항간에 ‘오경(五庚)이 지난 후 홍제존자(弘濟尊者·사명대사)가 통곡을 한다’는 참언(讖言)이 나돌았는데 무슨 뜻인지 몰랐다가 대사가 돌아가신 경술년(庚戌年·1610)이 다섯 번 지난 경술년(1910)에 일제의 강제병탐을 예언한 참언으로서 그해 가야산에 있는 사명대사비가 눈물을 흘렸을 때 비로소 알았다.
광복절이 있던 해에도 눈물을 흘려 일본 경찰은 그 유언비어를 두려워하여 이 사명대사비를 네 토막 내어 묻어버렸었다. 주한 일본대사의 독도 발언으로 나라 안이 들끓고 있는 이즈음 제천 신륵사의 외벽에서 사명대사의 일본 사행 벽화가 발견되었다는 보도는 그래서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