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임혜영(24)씨는 고교 때부터 지금까지 헌혈을 서른번 넘게 해온 까닭에 친구들로부터 '헌혈중독자'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부모님은 여자애가 무슨 헌혈이냐고 싫은 소리도 적지 않게 하셨지만, 제 고집을 이제는 조금씩 이해하시는 것 같아요."

그의 헌혈중독은 남자친구에게 전염되고 있다. 22일 오후 제주시청 주차장 한쪽에 서 있는 헌혈차. 임씨가 남자친구 조성환(24)씨와 헌혈차의 양쪽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조씨는 군 복무 때 헌혈을 두 번 했던 경험밖에 없었는데, 임씨를 만난 뒤 8번이나 더하게 됐다고 했다. 이 연인들은 모은 헌혈증서를 친구나 수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헌혈차를 찾는 것도 데이트 코스 중의 하나죠. 헌혈하고 건강체크하고 남을 도울 수 있어 좋죠. 게다가 영화표까지 받으니까 금상첨화예요."

1999년부터 제주시청 주차장에 서 있는 이 헌혈차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근래에 특징이라면 데이트하는 커플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 겨울 추위와 방학 등으로 헌혈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1월 1일부터 이달 28일까지 영화표를 나눠준 영향도 있지만, 젊은 여성들이 남자친구를 이끌고 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자친구 앞에서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헌혈하는 경우도 있어요." 대한적십자사 제주혈액원 소속으로 일주일씩 헌혈차와 헌혈의 집 등에서 교대근무를 하는 고은임(36)·이은신(27) 간호사는 "여자는 씩씩하게 헌혈하는데, 남자가 머뭇거리면 여자친구에게 점수를 잃겠죠"라며 웃었다.

제주시청 주차장 헌혈차의 경우 하루 평균 20~25명이 헌혈한다. 일반인들의 추측과는 달리 헌혈하겠다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헌혈을 하려는 여성 10명 중 7명 정도가 빈혈 등으로 헌혈을 못해 실제로 헌혈에 참여하는 사람은 남성이 많은 편이다. 헌혈차를 찾는 데이트족도 하루 평균 5~6쌍에 이른다고 한다.

스무세 살 동갑내기 김석철·정민정씨 커플은 김씨가 여자친구에게 헌혈을 권한 경우. 직장에서 6개월에 한번씩 헌혈을 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다는 김씨는 고교 때 이후 처음이라는 여자친구가 안심하고 헌혈할 수 있도록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혈액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데 가끔 생기는 수혈사고 등의 영향으로 헌혈인구가 줄고 있어 대한적십자사의 고민은 적지 않다. 영화표까지 구입해 나눠주곤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탓에 한시적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다.

헌혈을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헌혈을 하고 싶지만 빈혈 등의 이유로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신분증이 없거나, 귀를 뚫은 지 얼마 안 된 사람, 전날 술 마신 사람은 할 수 없다. 주민등록증을 체크하는 이유는 전혈은 2개월, 성분헌혈은 2주 이상 지난 뒤에나 가능한 데도 그 전에 또 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헌혈증서는 건강의 보증 수표인 셈이다."연인이 나란히 누워 헌혈하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장면도 흔치 않을 거예요." 고은심 간호사는 "올 봄에는 사랑을 실천하려는 연인들이 헌혈차에 더 많이 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