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변명은 "차가 고장 났어요" "오는 길에 사고가 났거든요"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즈음 작가들이 원고를 펑크낼 때 가장 자주 쓰는 말은 "컴퓨터가 다운돼서…" "데이터가 몽땅 날아갔어요!"일 것이다. 증명을 요구하지도 않고, 증명할 의지도 없는 합의된 거짓의 변명.
운이 좋았던 것인지, 우리 집 컴퓨터 관리를 자청해준 시동생과 세심한 남편 덕분인지 10년 넘게 원고를 쓰면서 기계 속에서 원고가 사라진 것은 두 번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가면 원고가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비례적으로 커진다. 100신(scene) 중에서 60신을 넘어갈 즈음이 되면 컴퓨터를 끄기 전에 저장 상태를 더블 체크하고, 디스켓에 다운받아 놓고, 스스로의 이메일로 파일을 전송해 놓기까지 한다. 10신, 20신도 분명 내가 쓴 원고이련만, 쓴 분량이 많지 않을 때는 사고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지…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도피성 이민이 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컴퓨터 하드 디스크의 포맷을 새로 하듯, 날아간 원고를 잊고 다시 시작하듯 떠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견딜 수 없이 힘들어도, 심어 놓은 것이 너무 많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참아 볼 수 있도록, 이 땅이 무언가를 심기에 비옥한 땅이 되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심어놓은 것들을 다지고 또 다지며 심은 것을 지키고픈 마음이 된다면 이민의 양상은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 같다.
(김희재·추계예술대 영상학부 교수· 시나리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