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외교부 장관은 일본 왕(王)은 천황(天皇)으로 부르는 것이 정부 방침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달 "일본 왕이라고 (호칭)해야 하나, 천황이라고 해야 하나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한 데 대한 일본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는 98년 김대중 정부 이후의 일관된 방침이다.
일본의 '천황'은 가장 일본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일본인의 정서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칭호이다.
'천황'의 원형은 중국의 천자(天子)사상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런데 근대 유신혁명 후 일본 위정자들은 신화에 기초한 신국(神國)사상에 이를 결합시켜 특별한 '천황상'을 만들어냈다. 즉 국수주의와 황국사상을 철저하게 결합시킨 것이다. 이 가공의 관념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천황'은 '현인신(現人神)'이며 그런 '천황'의 신민(臣民)인 일본인은 타민족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세계를 지배해야 할 운명을 지녔다는 것이다.
패전 후 새 헌법에서 '천황'은 일본의 '통합의 상징'으로 그 의미와 기능이 축소되었다. 그래서 전쟁 전 제국헌법의 천황은 '신(神)의 천황'이었다면, 전후 신헌법의 천황은 '민(民)의 천황'이다. '신민(臣民)'이 아닌 '국민의 천황'은 민의에 의해 그 위치가 정해질 뿐이다. 따라서 신헌법에서의 '천황' 칭호는 개칭되었어야 마땅했으나 일본은 그러질 않았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천황'은 일본의 '왕'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일왕'이라 칭하면 그만이다. 구태여 '천황' 칭호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천황' 칭호에는 우리 민족의 뼈아픈 굴욕의 역사가 배어 있어 더욱 그러하다.
또한 의전상의 관례라고 해도 대통령이 '천황폐하'란 말을 거침없이 발설해서는 안 된다. '폐하(陛下)'의 '폐(陛)'는 '천자의 궁전에 오르는 계단'이라는 뜻이다. '폐하'는 결국 궁전의 계단 아래에 있는 신하들이 계단 위의 군주를 우러르는 호칭이다. 잘못하면 대통령이 다른 국가 원수의 신하와 같은 위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고영자·전 전남대 교수·일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