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TV가 등장한 60년대.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 국민들의 상처를 씻어주는 '영웅'이 있었다. 프로레슬링의 전설적인 '박치기 왕' 김 일(76)이다. 반칙을 일삼는 일본의 야비한 레슬러들이나 자이언트 바바와 같은 거구들을 주특기인 박치기로 쓰러뜨리는 장면이 흐릿한 흑백화면에 나오면 모든 국민들은 통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국민들에게 숱한 감동을 안겨줬던 그는 40여년이 지는 지금 뭘하고 있을까. 그를 만나봤다.
▶회도 먹고 피자도 즐겨요
40여년이 지난 지금 김 일은 온화한 이웃 할아버지로 변해있었다. 박치기를 작렬시키던 카리스마는 온데간데 없다. 가끔씩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면 여느 할아버지와 다를 게 없다. 선이 굵은 이목구비와 건장한 체격만이 옛날 그의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되새길 수 있는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10평이 채 안 되는 서울 을지병원의 한 병실. 17년째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김 옹의 자그마한 보금자리다.
김 옹은 지난 89년 운동 후유증과 노환, 당뇨병이 겹치며 병원신세를 지게 됐다. 94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 올 때는 휠체어 없이는 거동조차 할 수 없었지만 현재 건강상태가 많이 호전됐다. 이젠 휠체어 없이 걸어다닐 수도 있고 가끔씩 수제자 이왕표 선문대 교수와 함께 지방 나들이도 한다.
하루에 세 끼는 꼬박꼬박 먹고 있다. 소화가 잘 되라고 주로 죽을 먹지만 병원에서 제공하는 음식도 잘 먹는다. 그리고 밖에서 외식을 하기도 한다. 회는 김 옹이 가장 즐기는 음식. 그리고 입맛이 없을 때면 피자를 배달시켜 먹기도 한다.
TV를 시청하는 것은 요즘 김 옹의 유일한 낙이다. 특히 시사 프로그램과 뉴스를 많이 본다. 바깥으로 잘 나가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 TV를 꾸준히 봐야 한단다. 심지어 TV를 켜놓은 채 잠들기도 한다.
치료는 하루 세 번씩 받는다. 12년째 병원비, 치료비를 무료로 지원하고 있는 을지병원 측의 배려에 감사하고 있단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저녁 10시에 잠드는 평범한 일상. 그 속에서 김 옹은 인생의 막바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인생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
60~70년대 커다란 인기를 누리던 프로레슬링은 현재 사양의 길을 걷고 있다. 충격적인 하나의 사건이 발단이었다.
1977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장영철과 일본의 오쿠마의 경기서 벌어진 링 난입사건 때문이었다. 이때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논쟁이 불거졌고, 국민들은 경악했다.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던 프로레슬링은 그 후 실낱같은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10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김 옹은 수제자 이왕표 교수와 함께 프로레슬링의 부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병실에 찾아오는 하루 평균 20~30명의 팬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주고 있으며, 그가 필요한 곳이라면 언제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언젠가 김 옹은 "프로레슬링은 각본대로 진행되는 쇼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 아니겠소." 죽을때까지 프로레슬링을 위해 살겠다는 김 옹의 우문현답이었다.
(스포츠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