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민은 생전에 사생활에 문제가 많아 고교선수에게 존경을 받기 어렵다. 또 야구계에 더 많은 공로를 끼친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칠순 원로 이원용(李源容·사진) 고문의 발언에 다른 사람들은 대놓고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김종락 회장이 나서서 "좀더 연구해 보자"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1969년 야구협회 대의원 총회에서 이영민 타격상 기금 증액 문제를 놓고 일어났던 일이다.

조선 최초의 체육 행정가인 이원용은 말년을 쓸쓸하게 보냈다. "상당히 괴팍한 양반이셨죠. 원래가 깐깐한 성격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더 심해졌어요. 후배들이 가까이 갈 수가 없었죠." 원로 야구인 신현철(80)씨의 말이다. 이원용은 1957년 이영민 타격상 제정도 반대했다.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적은 후배의 이름을 딴 상이 제정된다는 사실을 섭섭하게 느낀 것.

하지만 이원용이 한국 야구 발전에 끼친 공로는 이영민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신현철씨는 "야구선수로는 이영민이 더 큰 족적을 남겼을지 모르나 기획력과 조직력은 이원용 선생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 초창기 한국 야구엔 그런 행정 능력이 더 필요했다"고 말하고 있다.

1896년 한성에서 태어난 이원용은 오성학교에서 야구와 인연을 맺었고 1914년 오성구락부 선수로서 조선 내 일본인 최강팀이었던 용산 철도국을 두 차례나 꺾었다. 이 당시 1루수를 봤던 이원용은 투수였던 홍준기와 함께 '야구계의 보배'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원용은 1920년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1922년엔 자비를 들여 일본에 원정 중인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을 조선에 초청, 한국 야구사의 전기를 마련했다. 그해 12월 8일 조선일보 주최로 용산 만철구장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이원용은 전조선군 주장을 맡았으나 경기엔 출전하지 않고 심판을 봤다.

당시 이원용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올스타의 허브 헌터 감독에게 조선 원정을 간청했다. 조선체육회의 지원을 받지 못한 이원용은 동일은행에서 500원을 대출받는 등 직접 뛰어다니며 자금을 마련했다. 헌터 감독은 조선에 건너온 뒤 환영식장에서 "이원용씨 덕분에 한국 땅을 밟게 돼 기쁘다. 오늘 여러분의 열정을 영원히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원용은 1929년부터 33년까지 조선일보 기자로도 활동했다. 특히 체육 전문 기자로서 1931년엔 '과거 1년간의 운동경기계'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체육 활동을 정리하는 연재 기사를 게재했으며, 1964년까지 청룡 야구대회 관전평을 기고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해방 후 조선야구협회 창립에 주역으로 참여한 이원용은 행정가로서 한국 야구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 야구행정을 위해 많은 재산을 탕진한 그는 말년엔 동맥경화증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71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