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남성 영역으로 인식돼온 입법(立法)분야에 여성들이 약진하고 있다. 17대 국회에 40명 여성 의원이 진출한데 이어, 연초에는 법제처 50년 역사상 첫 여성 수장이 탄생했다. 국회 입법 활동에 여성의 영향력이 커졌다면, 이제는 성두의 입법 계획을 총괄·조정·심사하는 수문장 역할을 여성이 맡게 된 것이다.

26일 여성운동단체들이 한국여성개발원에서 마련한 두 명의 여성 장관 취임 축하 자리에서 김선욱 신임 법제처장은 "나 개인이 아닌 '여성'이 법제처의 수장이 된 것이다. 국가의 모든 법에 성인 지적 관점이 투영되는 시스템을 만들어가겠다"고 단언했다.

여성 국회의원 수의 증가와 함께 여성 정책보좌관의 활약상은 국회에서의 '여성 돌풍'을 예고하는 또다른 징후다. 4급 국회 공무원에 속하는 이들은 모두 29명. 대부분 80년대 여성학의 세례를 받은 386세대다. 의원과 친인척 관계로 이어졌던 기존 보좌관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16대 국회 이후 정책보좌관 공채제도가 정착되면서 박영욱(김명자 의원), 박광수(민병두 의원) 등 2명의 박사학위 소유자를 비롯해 3분의2 이상이 석사 출신으로 전문성과 실력을 겸비한 여성들이 대거 입성했다.

이들은 뭣보다 입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난해 12월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이 국가보안법 등 4대 법안에 밀려 표류할 때 남성 국회의원 152명의 호주제 폐지 지지 선언은 개정안이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야의 남성 의원들을 한자리에 모은 주인공이 이계안 열린우리당 의원.

그러나 이 의원을 움직인 또다른 '손'은 오순애 보좌관이다. 한국여성의전화 출신의 오씨는 여성운동단체들과 함께 막판 위기에 몰린 호주제 폐지를 위해 '남성의원 지지 결의'라는 묘안을 짜냈다.

그간 묵인돼온 KBS의 예산 심사를 법률에 명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오는 2월 임시국회에 상정되는 방송법 개정 법률안도 남성 의원과 여성 보좌관의 합작품이다. 최구식 한나라당 의원이 방송법 개정안을 발의한 데에는 경제학 석사 출신의 이혜정 보좌관이 있어 가능했다.

이씨는 10년의 국회 경력과 함께 문화관광위원회 관련 업무를 지속해온 베테랑 보좌관이다.

386세대가 주축을 이룬 17대 국회의 여성정책보좌관들. 왼쪽부터 박광수 김순미 조선옥 박영욱 조용남 허종미 김영옥 황금희 이건 씨. <a href=mailto:gibong@chosun.com><font color=#000000>/ 전기병기자</font><


유시민·김원웅 등 열린우리당 내 개혁당파 의원들 뒤에도 여성보좌관들이 버티고 있다. 장윤숙·이승희 등 여성보좌관들은 의원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며 이라크 파병 반대, 국보법 조기 폐지, 국민연금법 개정을 주도했다. 장 보좌관은 우리당보좌관협의회에서 "유시민보다 몇 배 더 강성"으로 입소문나 있다.

여성의원들에게도 여성정책보좌관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김현미 열린우리당 의원은 여성신용불량자에 대한 차별화된 구제책 제시로 지난해 국정감사 때 이목을 끌었다. 여성학자 출신 황금희 보좌관 덕분이다.

"4년 새 여성 불량자 수치가 2배 이상 급증했다는 것에 주목했죠. 대부분 남편의 실직으로 인해 자신이 생계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던 주부들이었습니다." 김 의원실의 이 같은 지적은 남성 실업자들을 중심에 둔 정부의 신용불량자 구제책이 생계형 여성불량자들을 포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에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이는 입법조사관의 여성 비율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의원들의 입법활동 지원이 그들의 역할이지만 사실상 국회의 입법 활동을 이끄는 핵심 존재다. 2005년 1월 현재 입법활동을 지원하는 심의관·조사관 등 4·5급 비율은 12%. 10년 전 단 한 명의 여성이 없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증가다.

조배숙 의원이 발의한 성매매특별법을 최종 손질했는가 하면, 여성의원들이 민법 개정안 단일안을 내게 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차인순 국회 여성위 소속 입법심의관은 “국회는 국민의 생활 현장과 의사결정권자들의 중간 지점에서 법안을 분석하고 내용물을 생산해내는 역할로, 일상의 문제를 더 깊이 체감할 수 있는 여성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라고 말했다.

입법부 밖에서도 여성학자와 여성법조인, 여성운동단체의 ‘삼각공조’가 입법에 대한 여성들의 영향력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성매매특별법에 이르기까지 여성 인권 관련 법률들이 이 트라이앵글 속에 탄생됐다.

386세대가 주축을 이룬 17대 국회의 여성정책보좌관들. 왼쪽부터 박광수 김순미 조선옥 박영욱 조용남 허종미 김영옥 황금희 이건 씨. <a href=mailto:gibong@chosun.com><font color=#000000>/ 전기병기자</font><

이 같은 구도는 2000년 이후 급증하고 있는 신진 여성법조인들로 인해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최일숙·최은순·배금자·이명숙 등 40대 여성 변호사들에 이어 전현희·김진·이향아·이인숙·정현욱 등 30대 초·중반 여성법률인들이 한국여성단체연합, 서울여성의전화,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등에서 자문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여성비율이 30%대에 육박하고, 2004년 서울대 법학과 입학생이 40%를 넘어서는 등 법에 관한 여성들의 관심이 증가하는 것도 희망적이다. 김엘림 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는 "이들은 약자로서 여성을 보호하는 차원의 법을 뛰어넘어, 실질적 성평등정책의 근거가 법 체계 형성을 주도할 핵심세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