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의 손에는 요즘 주황색 수첩이 늘 들려 있다. 가로 9.5㎝, 세로 16㎝인 직사각형이다. 다른 수첩보다 좀 넓게(9㎜) 줄이 쳐져 있다. 한 권에 1200원 짜리다. 작년 총선을 즈음한 천막당사 시절 민생 현장을 찾을 때, 모양은 달라도 수첩은 항상 함께 있었다. 작년 말 여야 지도부의 4자회담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첩엔 무엇이 적혀 있을까. 아직 꼼꼼히 들여다본 사람은 없다. 열린우리당측은 ‘공포의 수첩’이라 불렀다. 박 대표가 수첩만 보고나면 협상에 진전이 없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 수첩엔 뭐가 있나

국가보안법 등 4개 쟁점 법안이 논란이 됐을 때 당의 한 관계자가 그의 수첩을 살짝 봤다. 거기엔 ‘4대 국민분열법’ ‘연기금 사회주의’란 단어가 적혀 있었다. 4개 쟁점 법안, 기금관리기본법을 각각 비판하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누군가로부터 정리된 입장을 전달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박 대표는 회의 도중에도 어딘가와 통화하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각종 회의에서 박 대표를 자주 만나게 되는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중요한 표현을 메모하는 것을 여러 번 봤다”고 말했다. 공성진 의원도 “자기 마음에 들어오는 말들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했다.

4자회담 때는 휴대전화 메시지도 화제가 됐다. 열린우리당측은 “박 대표가 회담을 하다 말고 전화 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박 대표의 전략을 지배하는 ‘컨트롤 타워’가 있다는 식이다. 이 부분은 잘못됐다. 박 대표는 평소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 당일 4자회담 때는 수행비서의 휴대전화를 쓰다가 깜빡 잊고 갖고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 수첩대로 행동하나

임태희 대변인은 “회의 때면 이미 자기 생각이 있는 것을 여러 번 느꼈다”며 “현장에서 바뀌는 것은 없고, 회의는 자신의 의지를 뒷받침하는 결의의 자리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한구 의장은 “이야기는 충분히 듣지만 판단이 서면 한 방향으로 가더라”고 말했다. 여당측은 비난조이긴 하지만 “자기가 적어온 수첩 바깥으로 단 1㎜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박 대표는 지난 임시국회 때 신문법만 통과시키고 나머지 3개 쟁점 법안을 지킨 것에 대해 3일 기자간담회에서 “만족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정했던 ‘원칙’을 벗어나 타협했다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은 셈이다.

◆ 비밀 자문역 있나

이런 정황을 보면 수첩의 메모를 ‘입력’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명백하다. 박 대표가 간혹 20~30분에 걸쳐 전화한다는 사람은 누굴까. 당 일각에서는 박 대표가 과거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을 지목했다. 우선 꼽히는 것은 박 대표가 개인적으로 안다는 20여명이 핵심이다. 서울대·동국대 등 교수가 8~9명, 사업가·변호사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정리된 입장을 보고서 형식으로 박 대표에게 전한다는 것이다. 박 대표가 직접 묻기도 한다.

박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들이 만든 ‘상청회’도 주목 대상이다. 회원은 2만명 정도 된다. 정수장학생은 자동 회원이다. 한나라당 김기춘 김재경 의원, 열린우리당 오제세 홍창선 의원과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주선회 헌법재판관, 신승남 전 검찰총장 등도 회원이다. 박 대표의 한 측근은 “여론 청취 그룹은 있지만 조직적인 것은 없다”고 말했다. 진영 비서실장도 “비선 참모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 당내 전문가 그룹도 활용

박 대표가 대표가 된 뒤부터는 당내 전문가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특히 ‘4개 쟁점 법안’ 협상 때 그랬다. 국가보안법은 최연희 김기춘 장윤석 의원, 과거사법은 이인기 유기준 의원, 언론법은 고흥길 정병국 박형준 의원 등이 단골 자문대상이다. 경제는 이한구 유승민 의원이다. 첫 4자회담(21일)의 오후 회의가 한 시간 연기된 것은 이한구 의장의 의견을 듣다가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다. 국보법 협상 때는 박 대표가 ‘공연한 찬양·고무’를 삭제하는 것에 끝까지 반대하자 김기춘 의원이 “폐지보다는 여당과 합의 개정하는 것이 현실적 차선책”이라고 설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