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은희천(61)씨가 실종된 라파즈시멘트 공장으로 가는 길은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상태였다. 엄청난 해일은 건물 잔해까지 쓸어내고 땅을 반짝이는 하얀 모래로 덮었다. 'bin pang 10'이란 이름의 시멘트를 나르던 50m 가량의 대형 선박이 모래 위에 올라와 있다. 다리(롱아브리지)도 끊어져 30m 폭의 강을 배로 건넜다. 강에는 쓰레기와 시체 3구가 떠 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아체주 롱아빌리지. 주도(州都) 반다아체에서 20㎞쯤 떨어진 이곳 라파즈시멘트공장(다국적회사) 생산부장으로 일하던 은씨와 부인 이상록(59)씨는 지난달 26일 이곳 바다 밑에서 시작된 지진 직후 소식이 끊어졌다.
4일 은씨 부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자동차와 배를 번갈아 타고 30분 가량 모래밭을 걸어 공장을 찾았다. 은씨 부부는 공장 인근 사택에 거주하고 있었다. 해일이 쓸어담은 모래밭을 지나 토막난 야자수 숲을 헤치고 나가자 절반이 뚝 잘린 공장 건물이 드러났다. 공장 벽은 무너졌고, 건물을 지탱하던 철제빔들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높이 30m의 커다란 철제 탱크까지 기우뚱 찌그러져 있었다. 공장 지붕도 절반이 날아갔다. 엄청난 해일에 견딘 ‘lafarge’란 공장 이름이 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은씨 부부가 머물던 사택은 어디에 있을까? 공장 인근에는 사택이라고 짐작할 만한 건물은 흔적도 없었고, 어디가 은씨 사택이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공장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 있었다던 살림집 건물은 옥색 계단 10여단과 집터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은씨가 살았는지, 다른 공장 간부가 살았는지 아는 주민이 없었다. 한 주민은 “(사고 당시 은씨가) 부인을 데리러 차를 타고 가다가 해일에 쓸렸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지진 당시 공장에 있던 사람들은 해일을 피해 뒷산으로 몸을 피했다고 한다.
3일 은씨의 형 희원(68)씨는 희천씨의 외아들 현기(35)씨와 함께 이곳을 방문했다. 형제 중 막내인 은희봉(47) 항공대 교수가 국산 경비행기 실험비행 중 추락사고로 숨진 것은 작년 8월. 이들은 은씨 부부가 가지고 있던 비디오 테이프 1개를 발견했다고 한다. 외아들 현기씨가 보내준 손주들의 재롱 모습을 담은 비디오였다. 형 희원씨는 이 비디오를 롱아비치의 망망한 바다에 던졌다. '혹시 그 속에 있으면 손자들 재롱을 보라'고.
형 희원씨는 인도네시아로 갈 때 가족들에게 "꼭 살아 있을 거다. 강한 사람이다. 찾아오겠다. 산에 올라가 있을 것이다. 만약 시신이라도 찾으면 훼손이 많이 됐더라도 화장을 해서 데려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장을 보고는 망연자실했다. 전화 연락을 받은 가족들은 "'아무것도 없다. 유품도 제대로 못 건졌다. 모래밭에 술 한 잔 부어놓고 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형 희원씨는 4일 메단에서 자카르타로 떠났다. 2~3일 더 인도네시아에 머물 예정이란다. 차마 발걸음이 안 떨어진다는 것이다.
실종된 은씨는 지난 2002년 말레이시아에서 이곳으로 이동했다. 2001년 퇴직하려 했으나 "기술이 떨어지는 곳에서 몇 년만 더 고생해 달라"는 주변 권유를 뿌리치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