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93세를 맞는 정진숙 회장은 “출판인으로 보낸 60년에 대해 한 점 후회도 없다”고 말했다. <a href=mailto:rainman@chosun.com><font color=#000000>/ 채승우기자</font><

1945년 을유년(乙酉年) 11월 30일. 광복의 기쁨과 함께 좌우익의 정치 바람이 몰아치던 늦가을, 서울 종로구 경운동 68번지 민병도(閔丙燾) 전 한국은행총재 집에 30대 초반의 청년 4명이 모였다.

민씨와 정진숙(鄭鎭肅) 을유문화사 회장(92)과 아동문학가 윤석중(尹石重), 작가 조풍연(趙豊衍)은 그 자리에서 출판문화사업을 통해 해방된 조국에 이바지하자는 자못 진지한 ‘결의’를 맺었다.

내년으로 갑년(甲年)을 맞는 '을유문화사'는 사장 민병도, 전무 정진숙, 주간 윤석중, 편집국장 조풍연의 진용을 갖추고 그렇게 탄생했다. 일제하 조선일보에 10년 동안 연재됐던 벽초 홍명희(洪命熹)의 '임꺽정' 전집과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청록파 시인을 낳은 시집 '청록집'이 해방 공간 이곳에서 나왔다. 요즘도 매일 사무실에 나오는 90대의 '영원한 출판인' 정진숙 회장을 만났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봄에 위암수술을 받았어. 수술 집도의가 90세 넘은 사람의 위암수술은 처음이라더군. 잘 됐어요. 지금은 건강해. 끼니마다 술도 곁들이고."

-은행 출신으로 출판사업을 택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이 같은 집안 어른이었어. 민병도씨의 권유를 받고 정인보선생을 찾아뵀지. 그랬더니 '지금 건준(建準)이다 임정(臨政)이다 해서 난린데 저건 가짜 애국이야. 36년간 일제에 빼앗겼던 우리 역사 문화 그리고 말과 글을 다시 소생시키는 데 36년이 더 걸릴 것이므로 출판사업을 하는 것도 건국사업이야'라고 말씀하셨어. '민족문화의 밑거름'이란 말씀에 최종 결심을 했지."

-처음 낸 책을 기억하세요?

"그럼. 그때 우리 넷이서 의욕이 대단했지.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필자구하고 종이구하고 인쇄소 찾아다니고 정말 바쁘게 뛰어다녔어.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랑 공산주의 운동하던 이강국(李康國)이 윤석중을 만나러 왔다가 사무실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여기 와보니 정말 일하는 것 같군요'라며 발길을 돌릴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정확히 석 달 만인 1946년 2월 1일 이각경씨의 '가정 글씨 체첩'이란 26면짜리 소책자를 냈어. 옛날 우리의 좋은 문장을 골라 이각경씨의 궁체로 글쓰는 법을 가르치려 한 거지. (이각경씨는 역시 한글서예가로 이름난 이철경씨 언니로 건국부녀동맹위원장을 지내다 월북했다)."

1948년 6권으로 간행된 홍명희의 '임꺽정'

-당시 출판계에도 좌우대립이 심했을텐데요.

"우리가 경운동 민병도씨 집에서 결의한 게 있어요. 이름하여 '을유문화사 출판의 지향' 네 가지인데 그 중 첫째가 '원고를 엄선하여 민족문화 향상에 기여하자'였소. 그러니 좌우를 굳이 따지지는 않고 민족문화에 대한 학술서라면 무조건 내려고 했지. 지금도 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데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林巨正)'도 1948년 3월부터 11월까지 의형제편 3권과 화적편 3권 등 6권으로 냈어. 여기까지는 일제 때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것들이고 원래는 나머지 4권 분량을 완성시켜 총 10권으로 내기로 했거든. 그런데 홍명희가 그해 4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눌러앉아 버렸어. 그때부터 금서가 됐지."

-그동안 7000여종의 책을 내셨는데 그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책은 어떤 것입니까?

"그거야 '큰 사전'이지. 해방 후 조선어학회의 학자들이 일제하 조선어학회사건 때 법정증거물로 압수당한 사건원고를 1945년 9월 서울역 운송회사의 창고에서 마침내 찾아낸 거야. 당시 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던 이극로(李克魯·월북)씨가 원고뭉치로 책상을 두드리며 울분을 토하더라구. '누구 하나 '큰 사전'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니 우리나라가 해방된 의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 이 원고를 가지고 일본놈들한테나 찾아가서 사정해야 옳단 말이오.' 이극로씨의 별명이 '물불'이었어. 그의 열정에 감동해 일단 1권만이라도 내보기로 결심했지. 이렇게 시작한게 한글학회로 이어져 10년 만인 1957년 6권으로 완간되었어요."

1950년대 을유문화사가 직영했던 서점. 1955년부터 UN출판부 한국대리점도 겸했다.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지식산업인 출판을 계속 해오신다는 게 쉽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그런 어려움들이 올 때마다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얻으셨는지요.

"출판을 돈벌이로 생각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더 힘들었겠지. 그러나 민족문화 창달이라고 하는 큰 꿈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닥쳐도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지. 낙관적인 성격도 힘이 됐다고 봐."

-요즘처럼 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졌어도 인문 학술 출판은 어렵다고 합니다. 어떻게 전문학술서를 그렇게 냈습니까.

"도와준 학자들이 많아요. 국어학 분야는 한글학회와 함께 했고 역사분야는 진단학회가 많이 도와줬지. 사회학자 이상백, 고고미술사학자 김재원, 소설가 박종화, 국어학자 이희승 등 이름을 거론하자면 끝이 없어. 그런 대학자들이 늘 우리 사무실을 사랑방처럼 찾았고 그 자리에서 출판키로 결정되면 그대로 나갔지. 요즘식으로 하면 기획회의였다고 할까. 대신 내가 낸 책이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야 하니까 모든 책의 서문은 다 읽었어요. 그건 지금도 하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