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3 옌지의 낡은 아파트

출발전날 일행 모여 가짜 신분증 받아

중국 옌지(延吉) 베이(北)시장 맞은편의 한 낡은 아파트 3층 단칸방. 불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빈틈없이 창문을 가린 뒤 부흥이 모자(母子)와 은미, 50대 남자 등 4명이 모여 인사를 나누었다. 은미는 “오늘이 두 번째 만난다. 이름도 잘 모른다”며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부흥이가 ‘맏아바이’(큰아버지)라고 부르는 50대 조선족 남자는 가져온 가짜 신분증을 이들에게 나눠줬다. 마침내 부흥이 일행이 ‘중국 탈출’을 개시한 것이었다. 출발은 다음날 밤이다.

하지만 이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같이 떠나기로 했던 금희(25)와 은옥(17)이 모녀 등 세 사람이 연락두절된 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흥이 엄마는 “은옥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가 ‘니 조세야’(너 조선족이냐)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공안 같다”며 몹시 불안해했다. 그들이 공안에 잡혔을 경우에 대비, 24시간 안에 떠나야 했다.

부흥이는 기대감과 불안감으로 밤잠을 설쳤다. 부흥이는 밖으로 나가 PC방에 들어가 싸이월드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방명록과 답글 등 자신이 남긴 옌지에서의 모든 흔적을 지웠다. 혹 붙잡히기라도 하면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해질까봐서다.

11/29 광저우거쳐 쿤밍에
기차안에서만 90시간…4번 갈아타
중국인과 시비붙어 公安에 끌려갈뻔

첫 번째 관문인 옌지역. 안내인인 박 노인을 따라 일행이 역에 도착하자 대합실 입구에선 공안원이 눈을 번뜩였다. 일행은 역 주변에 흩어져 있다가 일부러 발차시간에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가는 틈바구니에 슬쩍 끼어들어가 공안의 눈을 피했다.

이제부터 선양까지는 13시간. 이후 선양~칭다오(22시간), 칭다오~광저우(30시간30분) 등 2군데서 기차를 갈아타고 광저우까지는 54시간 가까이 더 가야 했다. 불안하고 불투명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기차를 갈아탈 때는 공안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어둑어둑한 저녁이나 새벽시각을 택했고 낮에는 안내인이 이끄는 아지트에 숨었다.

11월 29일 광저우-쿤밍 기차에서 부흥이엄마가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있다.

특히 칭다오행 객차에서의 8시간은 진저리나는 경험이었다. 25일 오후 5시, 일행은 출발 5분 전에야 개찰을 했다. 발차 시간에 임박해 암표를 구하다 보니 침대칸은 없었고 딱딱한 ‘직각좌석’(잉쭤) 표였다. 기차에 올랐을 땐 이미 성냥갑처럼 초만원이었다. 열차 중간에 있는 좌석까지 비집고 들어갈 엄두조차 못낼 상황이었다. 7년간의 탈북자 생활에 억척스러움이 몸에 밴 은미가 남자 일행을 제치고 앞장 서 몸싸움을 하며 길을 뚫어 겨우 좌석을 차지하고 짐을 선반에 올렸다. 하지만 이 과정에 은미와 중국인 간에 몸싸움이 생겨 말다툼이 크게 벌어졌다. 박 노인이 재빨리 나서 30원을 건네주며 “저녁이라도 사 먹으라”고 달래지 않았다면 열차 공안원이 들이닥칠 아찔한 상황이었다.

떠난 지 4일째인 28일 광저우행 기차. 출발 30분 만인 7시20분쯤 열차 공안원이 나타나 검문을 차례대로 해왔다. 지금까지 기차 안에서의 검문은 없었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부흥이는 일어나 공안원의 행동을 살폈다. 가장 두려운 휴대용 신분증 조회기는 다행히 갖고 있지 않았다. 공안원은 부흥이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신분증 사진과 비교한 뒤 장부에 민족과 출신지, 이름 등 신분증 내용을 적었다. 일행은 자못 태연한 척했지만 마음은 얼어붙어 있었다.

검문이 별탈 없이 지나가자 부흥이는 긴장을 풀려는 듯 30위안을 주고 휴대용 비디오 수상기를 빌려 침대칸에서 꿈쩍도 않고 ‘홍콩 느와르’를 몇시간씩 봤다. 은미도 이어폰을 꽂고 워크맨을 들었다. 부흥이 엄마와 은미는 하루종일 침대칸에 지내면서도 화장을 하고 멋을 냈다. 은미는 굽이 뾰족한 부츠를 신고 다녔다. 이들은 4~7년씩 옌지에서 생활하는 동안 큰돈은 못 벌었어도 북한에서 못가졌던 것에 대한 욕심은 많아 중국여자들보다 부티가 나보인다. 그만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도 강해보였다.

출발 6일째. 몸으로 부대끼는 피곤한 여정이 이어지자 일행 서로간의 경계심도 많이 풀렸다. 부흥이 엄마와 은미는 어느새 ‘언니’, ‘동생’이 돼 있었고 부흥이는 은미를 ‘누나’, 취재팀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선양에서는 취재팀을 믿지 못해 ‘아지트’로 데려가지 않았던 안내인 박 노인도 꽤 마음을 열었다. 처음엔 어디로 가는 것인지조차 알려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표를 끊어다주곤 했지만, 이제는 다음 행선지만큼은 미리 알려줬다.

11/30 1차 월경시도 실패

가려던 루트 봉쇄돼…"새 루트 찾아라"

지난 11월30일 밤 중국 윈난(雲南)성의 쿤밍(昆明)을 떠나 동남아 국가의 국경을 향했던 탈북자 일행 6명은 허탕을 치고 사흘 뒤(12월3일) 쿤밍으로 되돌아왔다. 동남아 국가의 정정 불안으로 인해 종전까지 두리하나선교회측이 이용했던 루트가 막혔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안내인들은 새 루트를 찾기 위해 국경지대를 헤매고 다녔고, 탈북자 일행은 쿤밍에 허름한 아파트를 6개월 기한으로 빌려 숨어있어야 했다. 다행히 2주일 뒤 ‘아지트’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두더쥐 생활’에 탈북자들은 몸과 마음이 지쳐버렸다.

12월 3일 첫 번째 월경을 시도하러 떠나기 전에 부흥이가 기자에게 건네준 자필 메모.

탈북자들의 초조감은 난데없는 음식 투정으로 나타났다. 쿤밍에 도착한 3일 밤, 안내인은 탈북자 일행을 음식점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탈북자들은 일제히 고추장을 가방에서 꺼내더니 한족 종업원에게 “오이 안팔아요? 사다주면 안돼요?”라고 따지듯 물었다. 벌써 10여일째 기름기 많은 중국 음식에 익숙지 않은 이들이라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가급적 남의 시선을 끌지 않아야 한다’는 ‘행동수칙 1호’를 어기는 행동이었다.

여기에 더해 선옥이는 주문한 음식의 양이 예상보다 너무 적다며 “이걸 도데체 얼마나 받냐”고 신경질적으로 다그쳤다.

이에 안내인은 전에 없이 단호한 태도로 경고를 했다. “관광온 것 아니잖습니까? 여러분은 공안의 불심검문에 걸리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한끼 밥 먹으면서 오이 안 판다고 종업원에게 따져서 어떻하자는 겁니까?”

12월 7일 탈북자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유일한 오락인 카드 게임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모세 아저씨, 부흥이, 부흥이 엄마, 은미, 미선.

그는 몰래 기자에게 “1차 월경이 실패해서 심리적으로 불안한 것 같다”며 “그래도 자신의 운명이 달린 일인데 저렇게 작은 불편을 참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탈북자 중 제일 어리지만 ‘리더’ 역할을 하던 부흥이도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새 루트를 찾아나선 안내인이 떠난지 삼일이 지난 7일에도 연락이 없자 먼저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우리가 걱정되지도 않아요?”

꼬박꼬박 다른 사람에게 ‘선생님’이라고 존대하던 공손한 태도는 간데없었다.

12/4 초조해진 사람들

낡은 아파트 숨어 2주간 기약없는 생활
말수 줄고 짜증만 늘어…반찬 투정까지

4일부터 일행은 안내인이 6개월 임대한 쿤밍 외곽의 한 낡은 아파트에서 생활했다. 옌지 출발 이후 매일 숨가쁜 일정을 보냈던 일행에게 쿤밍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천천히 흘렀다. 밥 해먹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다. 함부로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 머물게 되면서 낮과 밤의 차이에 대해서도 둔감해졌다. 모세 아저씨가 가져온 카드로 게임하는 게 유일한 오락이었다. 부흥이는 “목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카드를 갖고 놀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손목을 때리는 것밖에는 걸 것이 없는 카드 놀이도 며칠 못가서 시들해졌다.

탈북자들은 날로 말수가 줄어갔다. 10일 아침엔 ‘여자용’ 방을 들여다보니 선옥이는 노트를 펴놓고 성경을 베끼고 있고, 부흥이 엄마와 은미, 미선이는 해바라기 씨를 까먹고 있었다. 워크맨에서 찬송가 노래 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이들은 열심히 해바라기 씨만 까고 있었다. 껍질은 한됫박은 돼 보일 정도로 수북했다. 은미는 “옌지에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지만 여기는 움직일 수 있는 곳이 남자방, 여자방 그리고 거실뿐”이라고 불평했다.

"배고파 탈북…중국서도 못살게하니 한국밖에 더 있나요?"

"中서 파출부·안마소·청소부등 온갖 궂은 일"
"붙잡혀 北수용소로…고문당해 이빨 다 빠져"
"이 난리 안치게 한국여권 미리 주면 안되나요"

옌지에서 동행한 부흥이 모자나 쿤밍에서 합류한 모세 아저씨 일행은 처음엔 취재팀은 물론 서로 말조심을 하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경계심이 사그라지자 탈북 사연과 중국에서의 험난했던 생활을 자연스럽게 쏟아냈다.

11월 28일 밤 쿤밍행 기차에서 부흥이 엄마는 "남한 사람은 우리더러 '왜 한국에 오려 하느냐'고 하는데, 문도 마음대로 못 열고 소리 한번 못 지르는 속 터지는 생활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으로 돌아가면 안전원이 오라가라 하며 돈도 다 뺏고 징역을 살린다는데, 숨 좀 쉬고 살려면 이제 갈 곳이 남한밖에 더 있느냐"고 말했다.

부흥이 엄마는 탈북 1년 만인 1999년 남편, 부흥이와 함께 용정 농가에서 붙잡혀 강제노역장에 끌려 갔었다. 다행히 부흥이와 옌지로 다시 나올 수 있었지만 남편은 그때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나오지 못했다.

은미는 작년 3월에 아들을 낳았는데 조선족 남편은 여태껏 아들을 호구(戶口:주민등록)에 올리지조차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심지어 때리기까지 하고 내가 벌어온 돈만 축내는 무능력자여서 벗어날 방법은 한국행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은미는 1997년 10월 무작정 두만강을 넘은 뒤 낚시를 하던 조선족의 소개로 들어간 집에서 1년간이나 중풍환자의 대소변 수발을 들었다. 그뒤 파출부와 안마소, 청소부 일 등 살기 위해 궂은 일은 다했다.

12월 16일 아침 쿤밍의 아지트에서 밥을 하던 선옥이는 한국 정부가 탈북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자에게 물었다. "우린 이제 북한 사람도 아니고, 흉내낼 순 있지만 조선족도 될 수 없고…. 싫든 좋든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은 한국밖에 없지 않나요. 한국에 가면 한국 사람이 된다는데, 이런 난리를 치게 놔둘 게 아니라 한국 정부에서 여권 만들어주면 곧바로 서울 가면 안 되나요?"

일행 중 정말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은 북한 탄광에서 중기기술자로 일하다 나온 모세 아저씨였다. 그는 97년 대기근을 피해 창춘(長春)에 나와 살면서 교회를 다니다 붙잡혀 자강도 정치범 수용소에서 1년을 살았다고 했다. 그는 고문을 당해 윗니가 모조리 빠졌다고 했다. 이 때문인지 모세 아저씨는 "다른 것보다 눈물 없는 세상을 소망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팀장=신재민부장 jmnews@chosun.com)

[▶ 아들 잡혀도 엄마는 속으로 울었다]

[▶ 낮엔 아지트서 두더지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