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계에 소위 토종(土種)자본 예찬이 높아졌다. 포스코, SK, 삼성전자 같은 우량기업과 주요 은행의 외국인 주주 비율이 높아지면서 외국자본에 대한 경계령이 높아갔고, 외국자본에 대항해 국내 주주들끼리 어깨동무하는 연대전략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외국 주주와 갈등을 빚고있는 SK를 돕기 위해 삼성전자와 팬택앤큐리텔이 ‘백기사(白騎士)’ 역할을 맡아 SK 지분을 매입해주었다고 한다.
국내 우량 기업과 은행의 다수 지분이 외국인 소유라는 사실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소버린이나 론스타, 그리고 증권회사 지분을 인수한 몇몇 투기자본이 한국적 경영 관행과 노사관계 등을 깡그리 무시한 채 오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 불안감은 어느덧 분노와 반발로 발전하게 된다. 마치 한국경제가 표독스런 하이에나, 혹은 살인 독수리(Vulture)의 습격을 받는 기분을 안겨주고 있다.
그래서 진보적인 일부 경제학자나 시민단체는 ‘한국 경제가 사라진다’고 걱정하기도 하고, 우량기업들이 몽땅 외국 투기자본(핫머니)의 먹잇감이 된 듯 야단이다. 이에 삼성이나 SK 같은 재벌 그룹들은 막다른 벼랑 끝에서 우군(友軍)을 만난 것처럼 반색하고 있다. 이들은 ‘삼성전자의 외국 주주들이 담합해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자고 결의하면 어떡 하느냐’면서, 외국 주주들의 한국 기업 길들이기에 미리 방어벽을 치려는 홍보전에 열중한다.
하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즘 만연하는 토종자본론, 민족자본론은 재벌그룹과 청와대·열린우리당의 386세대, 그리고 진보적인 이코노미스트들 사이에 핑퐁 치며 뜨거워지고 있다. 대통령 측근 386 중에는 ‘재계와 대화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재벌 기업 경영인들과 어울리더니, 이제는 ‘재벌은 밉지만 외자(外資)는 더 밉다’거나 ‘삼성, 포스코마저 외국에 넘어가면 되겠느냐’고 감싸기도 한다.
더욱 괴이한 현상도 있다. 학계에 있을 때는 그토록 재벌 때문에 한국경제가 망한다고 비판하던 좌파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이 정권에 들어간 후 거의 입을 다물고 있다. 여기에는 7년 전 외환위기를 부추긴 국제 핫머니와 그 돈줄을 조종하는 월스트리트식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이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정권의 핵심 인사 중에는 아무리 좋은 외국 자본도 나쁜 토종 자본보다는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동안 상극(相剋)이던 재벌과 좌파 세력이 외국 자본과의 전선(戰線)에서는 기묘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꼴이다. 여기에 재벌 그룹을 육성했던 박정희식 경제개발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보수 인사들까지 가세, 외국 자본은 악(惡)이고 토종자본은 선(善)이라는 이미지가 우리사회에 침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토종자본 예찬론은 좌파성향의 정권 주도세력과 경영권 박탈을 걱정하는 일부 재벌이 결탁해 조장한 허상일 뿐, 한국처럼 이미 글로벌 경제체제에 개방된 나라에서는 결코 찬양될 수 없는 논리다. 우선 토종자본끼리 아무리 결집해도 그보다 100배, 1000배 강력한 외국인 투자 세력과 싸워서 이길 수 없을 뿐더러, 설혹 한두 회사의 경영권을 둘러싼 조그만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국가경제 전체가 타격을 받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삼성 이건희(李健熙) 회장이 그룹 후계자를 마음먹은 대로 밀어붙이고, SK텔레콤 본사의 해외 이전을 막으려다가 자칫 국제 금융계의 신뢰를 잃어 나라경제가 몽땅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일부 투기성 투자자들의 탈법(脫法)이 눈에 거슬리고, 너무 많은 매매 차익을 챙겨가는 것을 보면 배알이 뒤틀릴 것이다. 일부 증권회사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배당금을 챙겨간 외국 투기자본과 노조가 갈등을 빚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 자본 중에는 한국에 투자했다가 빈털터리로 돌아간 곳이 있으며, 만약 저들의 탈법 행위를 제대로 적발해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 금융 감독당국의 무능이다.
소수의 말썽꾸러기들 때문에 외국 자본을 적대시하는 풍조가 자리잡는다면 나라경제를 멍들게 하는, 미련하기 그지없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무능한 재벌 후계자 몇 명의 경영권을 지켜주겠다고, 아니면 매매 차익과 배당금을 챙겨가는 게 배 아프다고, 외국 투자자들과 격돌하는 양상으로 가서는 안 된다.
(송희영 출판국장 hyso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