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입구를 막고 있으면 어떡해요? 당장 차 빼요.”

지난 10일 저녁 서울 대학로 지하철 4호선 혜화역 부근. 1t 포터 트럭을 대고 귤을 팔고 있는 최장수(36·서울 수유동)씨에게 식당 주인이 쏘아붙였다. 바로 운전석으로 들어가 시동을 거는 최씨. 10여m 떨어진 다른 식당 앞으로 차를 옮겼지만 30분도 지나지 않아 가겟집 주인이 또 뛰어나왔다. 이번에도 최씨는 두 말하지 않고 차를 옮겼다.

최씨가 집을 나서는 시간은 아침 8시.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하루 16~17시간을 거리에서 보낸다. ‘사람이 많겠다’ 싶은 곳이 일터인지라 아침에 집을 나설 때가 가장 막막하다. 이날은 점심 무렵에는 직장인들이 모이는 여의도, 오후에는 대학생들이 모이는 신촌, 저녁에는 연인들이 많이 찾는 대학로에서 종일 “한 꾸러미에 1000원. 굵은 것은 달콤하고, 작은 것은 새콤해요”라고 외쳤다.

하루에 10여 차례씩 메뚜기처럼 인근 상인들에게 쫓겨 요리조리 자리를 옮기는 생활이 4년째. 최씨는 “막막하고 서러운 느낌이 들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나는 할 수 있다. 절대 식구를 굶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고 했다.

충북 음성이 고향인 최씨는 공고를 졸업한 뒤 상경해 레미콘업체에 다녔다. 중소 무역업체에서 영업사원 일을 한 적도 있다. 95년 결혼해 2년여 만에 경기도 안산에 20평짜리 연립주택도 마련했다. 화려하고 번듯하진 않지만 열심히 살면 그럭저럭 큰 풍파 없이 인생을 살아나갈 자신감도 생겼다.

굴착기 기능사 자격증을 가진 최씨가 굴착기를 장만해 공사현장에서 일을 해주는 사업을 시작한 것은 97년 8월. 하지만 그해 11월 시작된 IMF 경제위기로 공사대금을 줘야 할 업체들이 줄도산, 순식간에 1억5000여만원이 날아갔다. 빚 청산을 하고 나니 네 가족이 소박한 꿈을 키워 가던 연립주택도 사라졌다. 최씨는 “둘째 분유값이 없어 쩔쩔매는 상황이라 한탄할 시간도 없었다”며 “화공약품 회사에 임시직 운전사로 취직도 했고, 식당에서 주방 보조일도 했다”고 말했다.

최씨의 ‘트럭 인생’은 2000년 시작됐다. 그는 떡볶이와 붕어빵을 파는 포장마차를 하다 1년쯤 뒤 피자 기계를 싣고 다니며 즉석에서 피자를 만들어 파는 장사로 업종을 바꾸었다. 사업 아이디어가 좋아서인지 한동안 한 달에 300만~400만원을 버는 ‘호시절’도 경험했다. 하지만 기업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가장들이 여기저기서 작은 점포를 냈고, 자신과 같은 ‘트럭 인생’들도 늘어나면서 수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가파른 하강 곡선을 그리던 수입은 올 들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점포주 등살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 보면 하루 매출이 2만~3만원에 그치는 날이 잦아졌다. 사업자금과 모자라는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끌어다 쓴 카드빚이 3000여만원. 매월 80여만원씩 빚을 갚아나갔지만 올 봄부터 이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결국 최씨는 지난 9월 말 신용불량자가 됐다. 일을 놓은 적이 없고 낭비한 일도 없이 열심히 네 가족이 살아 왔지만, 결과는 이랬다.

최씨는 찬바람이 불면서 귤 장사로 업종을 다시 바꿨다. 불황에는 ‘호사스러운’ 피자보다 1000원짜리 한 장으로 한아름 가져갈 수 있는 귤 장사가 더 나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제법 큰 귤은 6~7개, 작은 귤은 10개 정도를 한 꾸러미에 묶어 1000원에 판다. 15㎏들이 귤 20박스, 6~7개가 든 귤 꾸러미 400여개를 다 팔면 손에 남는 돈은 10만원 안팎. 물론 장사가 잘 되는 ‘특별한 날’ 이야기다. “아이들에게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주고 싶습니다. 시내 큰 서점에 데려가 읽고 싶은 책을 한아름 사 주고 싶은데, 그때가 연말 대목이라….”

아내도 집에서 휴대전화 액세서리 조립일을 하고 있다. “반찬값이라도 보태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택 융자금 50여만원과 1t 트럭 차량 할부금 40여만원을 갚고 초등학교 3학년 딸아이와 유치원생 아들 교육비를 빼면 한 달 살림이 빠듯하다. 아직 갚지 못한 빚이 1600여만원. 그래도 그는 버티고 있다.

“2005년?…” 최씨는 꿈꾼다. “지긋지긋한 그놈의 빚을 툭툭 털어버리고 그럴싸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카드빚 0원’을 자축하는 가족 파티를 벌일 겁니다.” 자정을 넘긴 시각 마지막 남은 귤 꾸러미 3개를 2000원에 넘겼다. 허리에 찬 전대가 제법 두툼해 보였다.

[▶ [생존 2004!] ① '1t트럭 행상' 최장수씨]

[▶ [생존 2004!] ② '자갈치 아지매' 주순자씨]

[▶ [생존 2004!] ③ '대리운전' 강길현씨]

[▶ [생존 2004!] ④만두업체 사장 김기식씨]

[▶ [생존 2004!] ⑤식당 두곳 운영하는 김창호씨]

[▶ [생존 2004!] ⑥ 주부 세차원 황경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