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성정을 사로잡는 그곳 만화의 힘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연간 발행 부수 15억5000만부(잡지·단행본 포함), 우리의 9배에 이르는 시장 규모 5조3170억원(2000년 기준), 세계 시장의 60%를 이루는 일본 만화의 원천은 무엇일까?

"작가·작품·유행 등 만화에 대한 파편화된 정보는 쏟아지는 데 비해 문화·산업적 측면에서 만화의 전체상을 조망한 연구는 여전히 빈약합니다. 만화사(史)적 접근을 통해 경쟁력을 해부한 학술서적을 꾸며 보려고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했습니다."

정현숙(39·한국방송통신대 울산 지역대학장·일본학)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해 도쿄대 인문사회계 연구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험·공상과학·판타지·무협·연애·결혼·성(性)·우정·조직사회·파벌·고부갈등·불륜·육아·스포츠·역사·요리를 두루 포괄하는 만화라는 그릇의 넓고 깊음을 체감했고, TV·영화·연극·게임·애니메이션·캐릭터 산업 등 다른 장르에 미친 파급력을 가진 '대중문화의 중핵(中核)'에 주목하게 됐다.

"일본 만화는 2차대전 전부터 시작해 문화적으로 축적되고 진화한 결과물입니다. 1920년대 신문 네 컷 만화가 대중에 파고 들었고, 전후(戰後)엔 싸고 들고 다니기 좋은 딱지 모양 만화 아카홍(赤本)이 유행했죠. 이런 '만화세대'들이 성장해 에로·중년용·숙녀용 만화 같은 새 영역을 개척한 겁니다."

저자는 해학이 있는 풍자화에서 이야기 전개에 중점을 둔 스토리 만화로, 아이들용 저급한 오락거리에서 전 국민을 독자로 둔 친숙한 매체로 성장하게 된 시대적 추이를 밟아간다. '생산' '소비' '제도·정책'이란 세 가지 분야로 나눠 일본 만화의 힘을 조명한다.

"자료를 모으고 연구에 깊이 몰입할수록 일본 만화의 외형적인 면만 그대로 들여왔을 뿐 기능적 토대는 수입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일본은 문부과학대신상·만화가협회상 같은 권위있는 수상제도를 마련해 만화가·만화문화의 위상을 높였고, 기초자료·통계를 연구·보존해 문화유산으로 발전시키려 애를 써왔습니다."

인간 만사는 '사람'의 문제다. 만화가 집단은 동인지나 출판사 신인상 제도를 통해 인재를 충원하고, 데즈카 오사무, 하세가와 마치코 같은 작가들은 '시대 혼을 담은 문화인'으로 정신적 추앙을 받고 경제적으로도 후대 받는다. 만화 비평과 학술연구도 활발해 만화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상호 상승작용을 하고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일본 만화의 전개과정에는 곡절도 많았다. 전쟁 직후 '재미'를 동반하지 않은 채 '건전한 웃음'만 앞세운 잡지들이 어린이들의 외면으로 줄줄이 폐간됐고, 90년대 대규모 출판사들이 성 또는 동성애를 소재로 삼은 질낮은 만화를 양산해 불매운동 등 독자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표현을 보장하는 '느슨한 규제'는 이런 과정을 통해 자리잡았고, 만화를 지금 위치에 있게 한 구름판이 됐다.

"우리 만화는 독자적 유산을 갖고 있음에도 연구는커녕 보완적인 주변부 문화로 박한 취급을 받고 있어요. 전체 대중문화를 견인할 중심축을 우리 스스로 무너뜨리는 격입니다." 저자는 독자를 흡인할 뛰어난 만화 작품이 나오도록 신춘문예 형식의 등용문, 국가적 지원, 사회적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일본의 문화풍토와는 차이가 커 만화가 대중문화의 주류로 등극하리라 전망하긴 어렵지만, '문학을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어 내겠다'는 다짐을 이뤄낸 일본 만화가들의 창작 혼(魂)은 본받을 만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