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6대 대통령이었던 존 퀸시 애덤스는 1828년 대선에서 앤드루 잭슨 후보에게 패배한 뒤 곧바로 보따리를 싸들고 한밤중에 백악관을 뛰쳐나왔다. 자신의 패배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백악관에 앉아서 승자를 영접한다는 데 대해 굴욕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리처드 닉슨은 1962년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뒤, “당신들은 이제 더 이상 닉슨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라며 언론에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도 패배는 고통스런 경험이다. 대통령 선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1948년 해리 트루먼에게 패배한 토머스 듀이는 “손에 흰 백합을 쥔 채 관 속에 누워 있는 기분”이라며 죽음에 비유하기도 했다. 애들레이 스티븐슨은 1952년 아이젠하워에게 패배한 뒤 링컨 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울기에는 너무 늙었고,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그래서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국가적 단합을 호소하는 패자들의 연설은 더 가슴을 울리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지난 2000년 선거 결과를 놓고 대법원 판결까지 가는 우여곡절을 겪었던 앨 고어는 “우리와 뜻을 함께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차기 대통령을 중심으로 굳게 단결할 것을 촉구합니다. 도전할 때는 맹렬히 싸우지만 결과가 나오면 단결하고 화합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입니다”라고 했다. ‘미국’ ‘미국인’이란 단어를 14번이나 사용한 고어의 연설은 역대 승복연설 중에서 백미(白眉)로 꼽히고 있다. ▶패자의 승복연설 관행은 1860년 링컨에게 패배한 스티븐 더글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더글러스는 “당파심이 애국심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링컨 대통령, 나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1896년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때부터 패배를 인정하는 전보를 보내기 시작했고, 1952년 스티븐슨 때부터는 TV 방영이 관례로 굳어졌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박빙의 승부를 펼쳤던 존 케리 후보가 “이제는 분열을 치유할 때”라고 승복연설을 했다. 그는 “미국 선거에서 패자는 없습니다. 당선과 낙선에 관계없이 모든 후보는 다음날 아침이면 미국인으로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영광스럽고 괄목할 만한 재산입니다”라고 했다. 이런 미국적 전통과 가치에 대한 자부심에서 다인종 국가인 미국을 하나로 묶는 힘이 나온다. 승자가 자신을 찍어준 사람들만의 대통령으로 행세하고 있는 우리 정치 현실에서 패자가 이처럼 마음에서 우러나는 승복을 할 수 있을지 안타까울 뿐이다.
(김기천 논설위원 kc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