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는 전통과 근대를 바람직하게 종합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전통 문화와 서구의 새 학문에 두루 능했고, 봉건 사회의 최상층 집안 출신이었지만, 왕조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지 않았고, 소설 '임꺽정'을 통해 민중 문화를 되살리면서 봉건제의 극복을 지향했습니다. 그는 1920년대부터 좌우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좌우 협동노선을 주창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만해 한용운이 광장설(廣長舌)로 유명했다면, 벽초는 차분하면서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는 종용술(從容術)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를 20년 동안 연구해 온 국문학자 강영주 교수(상명대)가 '벽초 홍명희 평전'을 펴냈다. 벽초의 문학 세계 연구에 관한 한 가장 권위있는 학자로 꼽히는 강 교수는 "벽초가 1928년 조선일보에 소설 '임꺽정' 연재를 시작한 동기는 당시 학교에서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 않으니까, 일반 대중에게 우리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쓰려고 했던 것"이라며 "벽초는 처음에 소설이 아니라 대중적 역사물을 쓴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작가로서의 천부적 재능이 드러나 소설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이번 평전을 통해 벽초와 가상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벽초의 글과 대담 자료 등을 총동원해 꾸민 이 대담에서 벽초는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시절의 일화를 공개했다. "내가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 조선일보사에서 당국에 교섭하여 며칠간 유치장에서 집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유치장 집필'인 셈인데 당시 조선일보 기자로 있던 파인 김동환군이 멋있게 표현하느라고 '옥중 집필'이라고 뻥을 친 것입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벽초는 해방 이후 좌우 양쪽에서 모두 존경받는 명망가였고, 중도파 정당인 민주독립당 대표를 맡았다. 벽초는 1948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그대로 남아 북한 부수상까지 지냈다. 김일성은 벽초의 환갑 잔치를 성대하게 치러주고, 항상 깍듯하게 모셨다고 한다. 강 교수는 “벽초는 김일성이 나중에 그처럼 비정한 정치인이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북한 지도부의 통일 의지를 믿었다”며 “그러나 벽초는 북한에서 글을 쓰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벽초가 1960년대에 '천리마'에 구한 말부터 식민지 시대 초기까지 회고록을 썼지만, 강 교수는 "자세히 읽어보니 벽초의 글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본래 문학에서 '사실'을 중시하고 '반항정신'을 예찬하는 리얼리스트였던 그는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북한 체제에서 자유롭게 글을 쓰지 못할 바에는 아예 집필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던 것 같다."
동시에 강 교수는 "만약 벽초가 남한을 선택했다면, 진보적 정치가였던 조봉암과 비슷한 운명을 겪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