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뱃속에 있는 아이를 향해 편지를 쓴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잉태한 그 아이에게는 이름이 없다. 엄마의 편지는 항상 '이름 없는 너에게'로 시작한다. 그 엄마는 음악대학 진학을 꿈꾸는 고교 3학년 여학생이다. 아이의 아빠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겠다는 고교 3학년생이다.
풋풋한 청소년들의 동화적 사랑을 그린 대부분의 하이틴 소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다소 충격적인 상황 설정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사랑과 성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교육적 효과에 감동까지 얹어준다. 영국에서 도서관협회가 주는 카네기 메달을 받은 이 소설은 심지어 학교에서 연극으로도 여러 차례 공연됐고, 이미 16개국 이상에서 번역된 현대 청소년 문학의 걸작이다. 감동적 문학 에세이로 명성이 높은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가 최근 암투병에 들어서기 직전에 번역을 끝냈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한번쯤 지평선 너머로 소멸되어 우주 속 어느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문득 우리 자신과 맞닥뜨려 보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일종의 여행과 같은 이야기다. 어디에서 끝날지 모르는 여행."
소설 속의 남학생 크리스의 내면 독백을 첫 문장으로 삼은 이 소설은 크리스가 지난 1년을 회상하는 가운데, 바로 그 기간 동안 크리스와의 관계로 인해 뜻하지 않게 임신한 여학생 헬렌이 뱃속의 아이에게 띄운 편지들이 겹쳐진다. 크리스와 헬렌의 관점이 서로 교차하면서 스토리를 끌고 가는 이 소설의 구성은 임신이라는 미증유의 사태에 직면한 어린 남녀의 불안하고 변별적인 심리 상태를 세밀하게 드러낸다. 순간의 실수로 인해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 없는 헬렌이 낙태까지 마음먹었다가 결국 출산하기까지의 과정은 성인들의 현실주의 원칙에 어긋나지만, 그 위반으로 인해 이 소설은 영원한 모성애와 생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향해 능동적으로 나서는 여성의 초상을 빚어낸다. 헬렌이 육아의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지는 것과는 달리 크리스는 자신의 장래를 위해 대학에 진학하려고 짐을 싼다. 그러나 그 순간 크리스는 헬렌이 보낸 '이름 없는 너에게'라는 편지 묶음을 열어 본다. 그와 함께 이 소설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독자들은 소설의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도입부로 되돌아와 크리스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를 상상하는 침묵에 빠진다. 예외적이고 미묘한 성장기의 상황을 다룬 소설답게 작중 청소년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의 결이 돋보이는 성장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