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리네크는 시, 소설, 희곡, 영화각본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작품활동을 해온 대형 여성작가이다. 그녀가 다루는 주제 또한 방대하고 도발적이다. 인간 내면의 복합 심리, 극단적으로는 동성애와 사도·마조히즘을 다룬 작품에서부터 여성 문제와 젠더 이론의 형상화, 코소보 전쟁 등 최근의 국제 분쟁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역을 망라하고 있다.
이러한 방대한 주제를 녹여내는 그녀의 기법 또한 실험적이고 다양하다. 옐리네크는 시, 소설, 희곡의 장르 개념과 매체성 자체를 문학적 성찰과 작품 쓰기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여러가지 장르의 틀을 글쓰기의 내용 안으로 끌어들여 각각의 유형 안에서 무한한 문학적 유희를 벌이기도 했다.
유미주의적 형식주의 기법과 현실적 소재로 내용을 결합하여 오늘의 세계에 숨겨진 내면적 치부와 세계화의 결과로 대표되는 부정적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끊임없이 대형작품을 쏟아내어 독일어권에서 가장 생산성 있는 작가로 꼽힌다.
‘리자의 그늘’(1967)이라는 처녀 시집으로 등단한 옐리네크는 1975년 ‘연인들’을 발표, 곤궁한 가정 출신의 17세 여고생 친구들의 시각으로 경직된 사회 구조 안에서 무고한 처녀들이 사회적으로 몰락해가는 이야기를 통해 남성중심 사회를 비판했다. 그 뒤 마르크시즘에 입각한 페미니즘적 관점의 소설적 형상화에 성공한다.
이어 우어줄라 크레헬, 프리데리케 마이뢰커, 잉에 뮐러, 가브리엘레 보만 등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여성작가들과 공동 작업으로 1977년에서 78년에 이르기까지 ‘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에 일어난 일 또는 사회의 지주(支柱)’라는 방송극을 발표, 이미 작품 활동 초기에 장르를 뛰어넘는 생산성과 예술성을 보여주었다.
이후 1986년작 장편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는 육체적·정신적 사랑과 예술과 소시민 사회의 대치적 긴장 관계 안에 병적인 어머니·딸의 관계를 형상화했다. 또 다른 여성문제 제기로 작가 자신이 문단의 주목을 받은 셈이다. 이 작품은 나중에 자신의 손에 의해 각본으로 재구성됐다. 1987년작 ‘병자들, 혹은 현대 여성들’ 역시 가부장 사회에 대한 예리한 문학적 복수를 시도한 작품이다.
1990년대 들어서 옐리네크의 문학세계는 더욱더 심화·확장되면서 여성 문제의 영역을 넘어서 전 사회적 전 인류적 주제, 그리고 현대 사회의 정치적 현안을 포착하고 고발한다.
옐리네크는 언어 실험과 형식 실험, 연출과 형상화의 도발성으로 유럽 연극계에 돌풍을 몰고 왔다. 코소보 전쟁을 풍자한 희곡 ‘잠복, 참모사령부, 그리고 슈탕글’(1996)은 전쟁의 참혹상과 국경을 넘어 침투해 들어오는 폭력의 여파를 나치즘과 과거 청산 문제까지 얽어 넣으면서 역사극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1998년작 ‘스포츠 연극’은 장장 8시간에 걸쳐 공연되는 대형작품으로 언어의 유희와 아이러니로 조탁된 탁월한 텍스트와 오페라적 규모, 합창으로 반복 낭송되는 대사의 음악적 효과 등을 살린 독창성 있는 걸작이다. 스포츠에 광분하는 현대 사회의 굴절된 폭력성, TV 광고의 홍수 속에 왜곡되는 현대인의 모습을 고발했다.
(정혜영 한양대교수·독문학 )